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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사진가, 최영모의 춤과 사진이야기

어휘소 2008. 8. 27. 19:53

 

 

무용사진가 최영모가 이야기하는 춤이야기, 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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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사진가 최영모씨와 그의 춤 사진집 <DANCES NUDES>중 일부

 

우리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비언어적 소통방식이 언어적 소통방식보다 그 영향력이 크다. 우리 일상생활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있어서 7할 정도의 의미가 언어보다는 바로 몸짓, 눈짓과 같은 비언어적 행위에 의해 전달된다. 무용사진가, 최영모.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는 바로 사진이다. 그것도 우주(宇宙)를 유영(遊泳)하는 멋진 춤꾼들의 몸짓, 날갯짓을 사진언어로 담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무대라는 소우주(小宇宙)'의 사진언어로.


지난 20여 년 동안 줄곧 '춤'사진만 고집해 오고 있는 사진작가 최영모. 그가 지금까지 무용계, 공연예술계, 사진계에서 일궈낸 성과들은 자못 크다. 그러나 정작 작가 자신은 그 성과들에 대해 모두 사진의 피사체가 되어 준 무용가들의 몫이고, 자신은 단지 그것들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작가가 사진을 선택하고, 또 무용사진 찍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를 들어보니 조금은 시시(?)하기까지 하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라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보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최영모는 어린시절부터 유독 기계와 친하게 지냈다. '그 길쭉하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텔레비전, 라디오 같은 기계들을 무수히 뜯고, 또 분해하며 놀길 좋아했다.
사진기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당시 중학생에게는 꽤 귀중품으로 꼽힐만한 물건, 바로 펜탁스였다. 뒤이어 야시카, 라이카 등 이제 작가의 분신이 되어버린 사진기들이 하나둘씩 그의 옆자리를 차지해가곤 했다.


청년 최영모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동네의 사진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놀았다. 아니 사진과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맘씨 좋은 '사진관 아저씨'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처음 암실이라는 곳도 구경했고, 스스로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법도 배워나갔다. 그 맘씨 좋던 사진관아저씨 덕택에 바로 사직작가 최영모의 미래와 꿈이 영글어 갈 수 있었다. 때문에 이제 그의 진로는 확연해졌다. 일생을 사진과 '연애하며, 때로 고통하며' 그렇게 살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작가는 군대 가서도 병영생활을 사진에 담는 일로 복무했다고 한다.


그가 무용사진과 처음 인연은 건 지난 78년 말께로 거슬른다. 중앙대 사진과 2학년 때의 일이다. 모교 무용과의 워크숍 사진촬영을 의뢰 받으면서부터 시작됐다. 사진일을 하면서 작가는 정지해 있는 피사체보다는, 질주하는 자동차 경주 같은, 움직이는 사진에 더 매료됐다. 그러나 부족한 장비가 그의 욕구를 자꾸 등떠밀곤 했다.
*대학 3년 때인 이듬해 79년, 작가는 유네스코회관에서 '나남사진전'이라는 첫 전시회를 열었을 만큼 일 욕심이 많았다. 친구 다섯 명이 뜻을 모은 이 전시회에 작가는 발레 사진들을 내걸었다. '춤'이라는 언어로 사진작가 최영모가 세상사람들과 첫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무용사진가 최영모가 그의 사진에서 표현하고 싶은 화두는 '에너지'이다. 무대 위에서 솟아오르는 듯, 가라앉는 듯…. 구르고, 뛰고 하는 무용가들의 그 넘치는 힘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찰나에 사라져버리는 춤의 동작들을 한 컷, 한 컷 그의 사진기가 섬광처럼 재빠르게 낚아채는 것이다.

 

그의 눈을 통하면 무용가의 정지된 동작 하나에도 금세 힘이 실리곤 한다. 이 '에너지'가 펄펄 살아있도록 잡아두기 위해 작가는 무대 위를 뛰노는 춤꾼 못지 않게 긴장해야만 한다. 이 팽팽한 긴장감이야말로 작가의 또 다른 생명력이기도 하다.


사진가 최영모는 때로 세상의 온당치 못한 인식과도 맞서야 한다. 힘겨운 저항으로 버텨야 할 때도 많다. 그는 93년, 오랜 인습을 깨는 '춤 사진집-DANSES NUDES'를 세상에 내놓았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국내 무용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야심찬 계획이었다.

 

30여 명의 무용수가 그 도도한 작업을 위해, 또 자신의 춤을 기록하기 위해, 옷을 벗고, 춤을 추었다. 태초 이래 인간이 가장 오랫 동안 입어왔으며, 또한 늘 가장 새로운 옷, 바로 맨몸으로 춤을 춘 것이다.
무용 ·사진계 두 평단에서도 물론 주목했다. '맨살의 움직임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한가를 보여주는 초유의 작업', '공연예술계, 좁게는 무용계에도 혁명적인 인식전환의 계기가 될 것' 이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작가는 그 당시를 두고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있어 맨몸은 진실이며, 미(美)이며, 예술이다. 인체미의 예찬론자인 작가는 사진집의 제목이 말해주듯 단지 '춤이 옷을 벗은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시인이 최영모를 두고, '인체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려고 무용계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게 아닌가 상상하게 된다'는 그 말에 가장 멋지고 근사하게 화답을 한 셈이다.


94년 작가는 또 하나의 역작 '댄스 김말애' 사진집을 책으로 엮었다. 중견무용가 김말애 선생이 안무하고, 직접 공연했던 '애장터', '어화넘자 어화넘' 등 우리 무용사에 기억될 열 한 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 무용가의 내적, 외적 변화를 늘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 작업. 여기에는 작가의 고행과도 같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된다. 때문에 이처럼 한 예술가의 궤적을 놓치지 않는 최영모의 사진작업은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받는다.


사진가 최영모는 여느 예술가들처럼 늘 변신을 꿈꾼다. 타인이 가지 않은 길, 밟아보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세계를 타진한다. 하지만 때로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시샘하는 듯한 벽이 그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꿋꿋하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헤쳐나갈 작정이다.


작가는 최근 십 수년 동안 즐겨 선택해온 흑백에서 컬러로 선회했다. 농삼아 들려준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젠 조금씩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란다. 낮에는 찍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암실작업을 감내하기엔 이젠 힘이 부치는 나이가 된 것 같다며 작가는 웃었다. 또다른 이유는 우리의 전통춤이 간직하고 있는, 화려하고 고유한 빛깔들을 아무런 가감없이 '기록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최영모는 '춤'을 사랑한다. 사랑없이, 그 자신 춤꾼도 아니면서 물경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무대를 서성이며 보낼 수 있었을까? 해맑은 심성으로 음악만 있으면 덩실 춤이 되는 김천흥 선생. 춤사위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이매방 선생. 이 대가들의 예술혼을 사랑하며, 작가는 그들의 몸짓들을 두고두고 후세에 남길 수 있어 또한 행복하다.
작가는 그가 무대 위에서, 사진기를 움켜쥔 손과 두 다리에 힘이 남아있는 그 날까지 춤사진을 계속 찍을 생각이다. 작가 스스로 '좋은 사진'이라고 믿고 있는, '느낌 좋고, 보는 이에게 감동을 안길 수 있는' 그런 사진을 찾아나설 참이다. 작가의 현장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쉰 이후가 되면 현장보다는 그가 기록해 놓은 사진들을 한 데 모아 정리할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런데 이순(耳順)을 훨씬 넘기고도 우주비행의 도전에 나섰던 존 글렌의 노익장처럼, 아마도 그를 아끼는 무용계에선 그 즈음에도 어김없이 '무대라는 소우주', 곧 현장에서 펄펄 '날 것'으로 살아있는 사진가 최영모의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할 것이리라.

글| 김혜진
 

김혜진 씨는 프리랜스 출판, 편집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사보와 잡지에 글을 써오고 있다.

 

<코닥소식> 199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