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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육명심 선생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어휘소 2008. 8. 27. 20:04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육명심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육명심

● ● ● 장생불사(長生不死). 오래 살아 없어지지 않는 것. 장승이라는 말은, 도교의 이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랜 동안 이 ‘장승’이라는
사진언어에 골몰해서일까?
사진가 육명심 선생은 얼핏
장승의 그 얼굴을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시골 마을의 어귀,
혹은 모퉁이에서
이방의 길손에게 길 안내를 하며, ‘생활의 감로수’ 역할을 하던 장승.


육명심 선생의 사진언어에서 장승은 ‘비록 아무런 벼슬도 없이, 그러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 곧 백민(白民)’과 탯자리를 같이한다.

 

‘장승과 백민’.

이는 육명심 선생의
35년 사진인생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화두였다.

 

 

 

 

육명심 선생의 사진 작업은 4개의 시기로 나뉜다. 이 중에서 장승과의 만남은 세 번째 시기인 80년대 작업들. 전라·경상도의 남도는 물론 제주, 충청, 강원 등 전국의 구석구석 그의 발길,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장승을 찾아 여행에 나섰던 당시, 선생은 자동차 대신 기차와 고속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주로 걸어 다녔다. 이 땅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흙먼지 날리는 길을 두 발로 ‘꾹꾹 눌러’ 밟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어머니의 품같이 따스하고 아늑한 우리 국토의 생명력이 살아 전달될 것이라고 선생은 믿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렇게 하나, 둘 선생의 사진기로 걸어 들어온 장승들은 선생이 70년대 후반에 이미 작업해 놓았던 ‘백민(白民)’과 함께 ‘육명심 사진 일천구백구십사년’이라는 책으로 묶여져 세상 사람들과 만났다.


“나는 숨을 쉬고 있네,

돌 속에서 숨을 쉬고 있네,

나무 속에서 숨을 쉬고 있네.

하늘과 땅 사이, 무정물,

그 모든 것 가슴속에서 숨을 쉬고 있네.”


마치 ‘생명’의 고귀함을 간과한 채 살아가는 우리를 조용히 나무라는 듯, 선생은 그렇게 장승을 통해 ‘생명’이라는 화두에 대해 말을 걸고 있다.


장승을 찾아 떠난 여행은 8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선생은 그 이유에 대해 어떤 일이든 한번 들어서면 쉽게 빠져 나오려 하지 않는 당신의 편집광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관한 선생의 짧은 일화 하나. 83년, 선생은 미국에서 날아온 사진가 지우들과 함께 남도 순례를 하던 중이었다. 전남 구례에선가, 마치 창세기가 열리듯, 하늘의 구멍이 뚫린 것처럼 대자연의 신비가 눈앞에 연출되고 있었다. 그때 선생의 친구들은 모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행 중 단 한 사람, 선생은 사진은커녕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 좋은 ‘꺼리’를 앞에 두고 왜 셔터를 누르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선생의 대답은 간결했다.

 

“난, 벅수(남도에서는 장승을 이렇게 부른다)만 찍을 테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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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이면서 근엄하고, 성나 있으면서 노기(怒氣)를 숨기고, 때로는 볼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는 지혜로운 모습, 바로 장승의 얼굴이자 우리 모두의 얼굴은 아닐는지. 곧, 선생의 두 번째 사진작업이었던 ‘백민’의 얼굴이기도 하다.

70년대 후반, 선생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시골의 오지 마을을 누볐다. 논둑길에서, 어느 이름 모를 시골길 고목 아래서 질박한 토종의 모습으로 기꺼이 피사체가 되어준 촌로들. 골 깊게 패인 그들의 얼굴에서 희로애락, 삶의 원형질이 한 점의 가감없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선생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진 다음 작품들인 장승의 얼굴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장승’과 ‘백민’을 찍기 이전인 70년대 초반, 선생은 문학, 음악, 미술계 등 이땅 예술가들의 족적을 좇으며 ‘기록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른바 ‘한국의 예술가’로 불리는 선생의 첫 번째 사진작업의 시기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세계가 선생의 사진기가 빚어내는 또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질마재의 시인’ 서정주, 그리고 구상, 미술계의 거목 김흥수, 판소리의 대가인 임방울, 박귀희 등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내로라하는 각계의 예술 대가들이 선생의 사진기에 포착됐다.

육명심 선생은 인터뷰어에게, 당신을 ‘귀명창’이라고 소개했다. 판소리 명창을 찍을 때면 그들과 소리 한 대목씩 주고받으며 흥을 돋운 뒤, 분위기가 얼추 고조되었다 싶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찰칵’, 셔터를 누르곤 하였다.


94년 발간된 사진집에 선생은 ‘아내 이명희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35년 전, 서른을 훌쩍 넘긴 선생의 뒤늦은 결혼 직후, 이미 사진 공부를 했던 아내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선생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남편에게 슬며시 사진기를 내밀었다. 그리고 기꺼이 남편의 사진 스승이 돼 주었다. 선생의 사진 입문은 그렇게 우연찮게 시작됐다. 선생은 가끔 아내에게 “그 때 사진 찍는 일 대신 ‘시쓰기’를 고집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무명의 3류 시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며 농을 건네곤 한단다.


선생에게 ‘좋은 사진’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마치 인간이 배설을 하듯, 그렇게 원시적이고, 또 본능적이며, 자연스런 것이어야 한다고 선생은 믿고 있다. 제자들에게도 늘 그렇게 일러준다. 또 학생들에겐 절대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치지 않는 게 선생의 방식이다. 학생들에게 사진찍기를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체험케 하고, 그네들에게 숨어있는 잠재력을 촉발시켜 주는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길을 준비하면서 조금은 느슨하다 싶은 제자들을 보면 추상(秋霜)같이 호통을 쳤을 만큼 단호했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어느새 국내외 사진계의 중진 작가군(群)이 되어 있어 선생을 흐뭇하게 한다.


선생의 ‘길 떠남’은 최근 ‘깨달음을 위한 고행과 절제의 땅, 티베트’로 이어진다. 히말라야 설산의 대자연과, 끝간 데 없는 하늘이 펼쳐 보이는 그 신비의 땅이 선생의 사진에 담겼다(인사동에 있는 한 미술관 정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과 함께 들렀던 어느 주점. 그곳에서  선생의 티베트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은 티베트에서 고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정신 세계의 뿌리가 고스란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며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정년퇴임으로 교직을 떠나 있는 선생은 요즈음, ‘노자와 장자에게로의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고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두 동양의 사상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바다에 빠져 살았노라는 육명심 선생. 앞으로 티베트에서의 영감과, 아직 이르지 못한 그 어떤 ‘영적인 것’을 사진으로 담기 위한 ‘새로운 탐험’에 나설 참이라고 했다. 
 


김혜진 씨는 프리랜스 출판, 편집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사보와 잡지에 글을 써오고 있다.
<코닥 소식> 200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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