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형 옹, '황도붕기풍어제', 쇄납과 함께 한 50년
붕기풍어제, 쇄납과 함께 한 50년 바다인생-강대형 옹
1995년 12월에 뵈었던 강대형 옹.
붕기풍어제의 한 장면-충청남도 태안군청 사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18번지. 강대형 옹의 50년 소리인생은 바다를 달래고, 신을 달래고, 또 뱃사람들의 시름과 한을 달래며 살아오고 있다. 뱃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돼 온 바다. 바다는 그들에게 희망이며, 꿈이며, 부의 원천이며, 또 때로는 절망이기도 하다.
일흔네 살, 강대형 옹의 바다. 노인에게 그 거친 바다는, 붕기풍어제와 함께 해 온 굴곡진 삶의 현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강 노인에게 그 바다는 또한 생의 신명 넘치는 놀이터이진 않았을까?
‘칠산 연평 다불어 먹고/
어안도 바다에 농장만 친단다./
에헤 어허-쿵/
배 임자네 아주머니 술동이 국동이 뒤집어 이고/
발판(조판) 머리에서 아콱거린다./
칠산 바다에 조기도 많고/
우리네 아주머니 돋도 많다./
순풍에 돛 달고 만경창파로 떠나세/
돋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에헤-어허쿵-에헤 어허쿵’
이 노래가 안면도 황도마을의 붕기타령 중 가장 많이 불리는 ‘배 나가는 소리’다. 메기는 소리(선소리)는 상쇠잡이가 맡는다. 이때 강대형 옹이 부는 쇄납이 한껏 흥을 돋운다. 반면 강 노인이 부르는 대표소리 ‘들어치기’는 조기를 가득 싣고 돌아온 만선의 배 위에서, 소금으로 조기를 절이며 부르는 노래이다.
“어여- 어여- 어여- 어여/
조기야, 무새야 어디를 갔다가….
열댓 명이 모여 앉아 부르는 구성진 노래가 바로 ‘들어치기’지.”
선소리와 받는소리를 한 소절씩만 들려준 강 노인은, 혼자서 하는 노래라 영 흥이 나질 않는 모양이다.
“요즘은 이곳에서 붕기타령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 그러다 보면 사라지고 말 것이여. 그러니 딱허지.”
붕기풍어제는 지난 91년 7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까지는 강 노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실정이라며 노인은 안타까워했다.
풍어제는 정월 초이튿날, 황도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그해 바다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 한 마리를 잡아 ‘피고사’를 지내고, 쇄납· 꽹과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한바탕 풍물놀이가 펼쳐진다.
제사 준비는 대개 섣달 보름께에 붕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되는데, 이 일은 온전하게 강대형 옹의 몫이다. 창호지를 사고, 손수 대나무를 다듬고, 흰 창호지를 일일이 풀로 붙여가며 붕기를 만든다.
붕기풍어제는 지난 1977년, 전국 민속경연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 이야기로 말문을 돌리자, 강대형 옹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우리마을에서 할아버지 스물다섯, 할머니 스물다섯, 모두 쉰 명이 대회에 나갔지. 그런데 그날따라 할머니들이 ‘굴 부르는 소리’를 어찌나 잘 부르던지…. 그 덕분에 우리마을이 대통령상 받았지.”
이 경연대회에서도, 강 노인이 스무 살 시절부터 불었다는 쇄납이 큰 역할을 했다.
“내게 날라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따로 없어. 혼자서 자작했지(강 노인은 '독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태평소를 너무 많이 분 까닭인지, 폐가 조금 나빠진 것 같다는 강대형 옹. 50여 년을 줄곧 불어온 쇄납의 동팔랑(나팔처럼 둥근 부분) 쪽이 뱃사람의 신산한 삶을 보여주듯 녹이 슬어 있었다. 그런데 강 노인은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너무 오래 써서 그렇지.”
먼 길 취재 온 이들을 위해 날라리 소리를 들려 주려다가, 리드(입으로 부는 곳) 부분이 찢어져 소리가 갈라졌다.
“옛날에는 갈대를 썼는데, 요즘엔 흔히 구할 수 있는 빨대(스트로)를 주로 써. 소리는 갈대가 잘 넘어가고, 듣기도 좋아. 갈대는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잘 찢어져서 요즈음은 잘 안 써.”
선친 대대로 안면도에 뼈를 묻고 살아왔다는 강대형 옹은 이제 그곳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다. “오늘 같은 인터뷰를 많이 해 보셨겠다”고 하자 “밤낮 다니러 와. 멀리 서울서도 오고, 여기 대전에서도 오고….” 하신다.
장성한 4남 1녀는 모두 대처로 나가 직장에 다니고, 황도마을에서는 강 노인 혼자 집을 지키며 머물고 있다. 이웃에 사는 둘째 아우 강대선 씨(64)가 풍어제의 상쇠잡이를 맡으며,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할머니는 3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났지. 내가 마흔 여덟에 혼자 됐다가, 이번에도 할머니를 먼저 앞세웠어.”
강대형 옹은 쉰이 넘어서까지 배를 타며, 바다와 함께 살았다. 멀리는 동지나해까지 나가보기도 했지만, 거개는 서해의 칠산 바다에서 주로 조기와 씨름했다. 뱃사람들에게는 ‘칠뫼’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곳이 조기잡이의 황금어장, 칠산 바다였다.
이곳에서 조기는 ‘하늘에서 내리신 고기’라고 불렸다 한다. 조기떼가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분다 하여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한철인 4월에도 조기가 많이 없어. 대신 갯벌에서 바지락이나 굴을 따서 수출 나가기도 해요. 이곳 사람들 부자여, 허허.”
강 노인은 요즘 충청남도에서 지원하는 30만원의 연금으로 생활한다. 그 연금으로 무형문화재 모임 회비도 내고, 대전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참가하곤 한단다. 대전에 한 번 나가면 하루씩 묵게 될 때가 많아 10만원은 족히 들어간다며 ‘허허’,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이는 강 노인이다.
가끔 ‘젊은 대학생 새악시’들이 붕기타령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절로 흥이 나 힘든 줄 모르고 소리를 가르쳐준다는 강대형 옹. 바다와 신을, 뱃사람들의 한과 정서를 달래며 불린 붕기타령, 들어치기 노래. 이 노래가 안면도 황도마을의 풍요와, 이곳 어르신들의 건강을 함께 지켜주기를 기원하면서, 나는 안면도 겨울바다를 떠나왔다.
인켈 사보 <인켈메아리> 199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