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상 프로의 '유쾌한 반란'
ⓒ 오솔길
꼴찌의 유쾌한 반란
이기상 프로
블랙 정장 슈트 때문이었을까?
그에게서 챔피언의 위엄이 느껴졌다.
우승 이후 달라진 점을 묻는 질문에, “이젠 외출할 때면 옷차림에도 신경이 쓰이게 된다.”면서 그는 그 불편함이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해 목표를 초과달성한 여유에서인지, 인터뷰 내내 그는 포장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시원스레 풀어놓았다. 인터뷰를 끝내고 기자가 내민 취재수첩에다 그는 “즐거운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기상 프로, 2009. 12. 31” 라고 적었다.
SBS코리안투어 2009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동부화재 프로미배 군산CC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기상 프로(24). 그와의 인터뷰는 한해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오후에 이루어졌다. 1월 초부터 그가 한동안 서울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1월 3일부터 45일 일정으로, 태국에서의 전지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동부화재 프로미배 군산CC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제 목표는 16강 진출이었어요. 그래야만 2010년 투어 풀시드를 획득할 수 있었거든요. 만약 16강에 들지 못하면 퀄리파잉스쿨전에 나가거나, 혹은 2부 투어로 다시 내려가야 했죠. 그렇게 되면 정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세 차례 시드전에 나가본 결과,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알거든요, 그래서 더욱 간절했죠.”
그가 가진 챔피언의 위엄
바로 전 대회였던 남해힐튼오픈까지, 그의 상금랭킹은 63위였다. 시즌 마지막 대회를 남겨두고, 그에겐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애타는 간절함이 통했을까? 동부화재 프로미배 대회에서 16강 진출을 확정짓고는, 그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부담을 떨쳐버린 그는, 8강, 4강을 넘어 결승에서 정재훈 프로를 2홀 차로 제치고 생애 첫 정상에 올랐다. 투어 프로 데뷔 3년만의 정상 등극이었다. 기자가 “생애 첫 승이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죠.” 하자, 그는 “같은 시기에 출발한 동기들에 비한다면 자꾸 뒤처진다는 조바심도 없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과 2009년, 톱랭커 대열에 합류한 배상문, 이승호, 김경태, 강경술 프로가 그와 같은 시기 데뷔했던 동료들이다. 우승을 경험한 동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리는 여건들이 그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대열에 그도 빨리 가 있고 싶었다. 동기들과 달리 그에겐 딱히 소속사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동부화재 프로미배 우승으로, 소속사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그는 귀띔했다.
“16강 진출로 풀시드를 결정하고는 마음 편하게 쳤어요. 마음 비우고 공을 치니까 정말 잘 맞더라고요. 우승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아, 나도 내년 초엔 발렌타인 챔피언십 나갈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강풍이 부는 가운데 치러졌던 동부화재 프로미배 결승전. 이기상 프로에게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12번홀(파4)까지 정재훈 프로에게 3홀 차로 앞서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하지만 13번홀부터 15번홀(이상 파4)까지 연속해서 정재훈 프로에게 잃게 되면서 승부는 다시 원점. 우승의 향방은 여전히 안개 국면이었다. 그러나 16번홀과 17번홀에서 이 프로가 다시 승리하게 되면서 대회는 종료됐다. 어느 매체의 한 기자는 그의 우승을 두고 ‘꼴찌의 반란’이라고도 표현했다. 이 말에 이기상 프로는 “사실 그럴 만도 했죠.” 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2008년에 그가 거둔 KPGA 투어 성적은 115위. 그리고 2009년 그의 최종 상금랭킹은 14위였다. 그의 첫 승이 또한 특별했던 건 군산 CC에서 열린 첫 프로대회 우승이었다는 것. 그는 대회를 치르면서 사용했던 클럽과 가방, 장갑 등을 군산CC에 모두 기증했다. 이 기증품들은 후에 골프박물관을 만들 때 귀한 전시자료가 될 것이라며 그는 흡족해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태국에서 하는 동계훈련 프로그램은 주로 체력훈련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급격하게 불어난 체중감량도 해야 하고요. 또 쇼트게임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겁니다.”
2009년 시즌을 보내면서 그의 성적을 방해 했던 요인 중에는 체중증가도 한몫 했다. 2008년 여름, 전반기를 마치고 훈련을 하던 중 그는 다리를 다쳐 한동안 연습을 하지 못했었다. 더군다나 갑갑한 마음에 깁스를 한 채 한 달여 가까이 남해로, 서해로 여행을 다니면서 식도락을 즐기다 보니 금세 체중이 불더란다. 그렇게 늘어난 체중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그는 요즘 무척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주로 달리기도 하고, 유산소 운동도 많이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함께 운동하는 팀들과 축구도 하고요. 11월엔 첫 우승한 기념으로 아버지와 지리산행을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일이 많아 못 갔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녔었다는 그는 겨울산행을 놓친 게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부친 이성노 씨(51)는 종종 대회에서 캐디백을 직접 메가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부자가 친구처럼 잘 지내다가도, 대회에서 선수와 캐디로 만나면 의견 충돌이 잦곤 해서 안타깝기도 하다는 아들이다.
“선수가 공을 잘 못 치거나 실수를 하면, 선수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게 캐디의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캐디의 본분은 잊으신 채, 아버지로서 제가 잘못 친 점을 지적하며, 혼내시곤 하세요. 물론 그 지적이 옳지만, 저도 게임이 안 풀리다 보면 아버지께 공연히 화풀이를 할 때도 있고요.”
지난 첫 승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아버지께 가장 감사한 마음이다”며 감격해 했다.
그런데 그의 생애 첫 승 시기는 사실 5개월여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 6월 초에 치러진 금호아시아나 오픈에서다. 그는 3라운드까지 공동 2위였다. 마지막 챔피언 조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그는 너무 긴장한 탓에 실수가 많았다. 더구나 이 경기는 공중파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챔피언 조에서 경기를 해본 경험이 딱 한 번만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런 생각이 간절해지더란다. 이 금호아시아나 오픈이 끝나고, 그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친구들 보란 듯이, 장난기 어린 글을 남겼다.
“나, TV 나오는 남자야!” 라고.
연습만이 전진할 뿐!
그는 열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태권도학원 다니듯, 골프 치고 싶으면 치고, 싫으면 집에 가서 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2년을 배운 뒤인 초등학교 5학년, 서울시장배 골프대회에 나가 초등부 3위에 입상하면서 그는 골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동메달을 목에 걸고 집으로 오는 내내 기분이 좋았죠. ‘아, 이런 기분 때문에 운동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집에 오자마자 부모님께 골프를 계속 배우겠다고 말씀드렸죠.”
그의 올 투어 목표는 ‘상금왕’ 도전이다. 지난해 1승에 비하면 대폭 상향조정된 셈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만심이나, 혹은 방심은 경계할 참이다. 지난해 6월 금호아시아나 오픈 4위 이후 그는 뼈아픈 후회를 한 적이 있다.
“4위를 하고 보니, 남은 기간 두세 번만 더 예선통과를 하면 새해 풀 시드는 쉬울 것 같았어요. 그러니 연습을 게을리 했죠. 제 나쁜 습성 중 하나인데요, 어느 정도 목표치에 도달했다 싶으면 더 이상 도전의지가 생기지 않았어요. 끈기가 부족한 거죠. 공이 조금 잘 맞으면 끝까지 연습해서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도, ‘이제 됐다’ 하면서 중간에 그만두곤 했죠.”
다행히 지난해에는 후반기 들면서부터 연습시간을 대거 늘리면서 그는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었다. 하루에 퍼팅 연습만 2시간씩 하는 건 기본에다, 해지고도 밤늦게까지 그린을 떠나지 않았다. 또 숙소에 들어서도 30~40분씩 지독하게 연습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에게는 땀 흘려 연습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2009년이었다. 그의 장차 꿈은 일본투어에서 좋은 성적을 낸 뒤, 양용은 프로처럼 미 PGA에서 뛰어보는 것. 그 첫 번째 꿈의 도전을 위해 올해 말에는 일본 Q스쿨에 도전할 예정이다.
그는 얕은 지식이라며 겸손해 했지만, 자동차 튜닝에도 꽤 관심이 많다. 하지만 요즘은 애써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 중이라고 한다. 어렵게 이룬 첫 승 이후 골프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봐서란다. 하물며 그는 평소 즐기던 컴퓨터 게임도 멀리할 만큼 2010년에는 더 나날이 독해질 요량이기도 하다.
<Club KPGA> 2010년 2월호
인터뷰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