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놀이 연구가 이철수 선생님
20여 년 만에 다시 보는 폭설이란다. 마치 한밤의 게릴라처럼, 새벽녘 동틀 무렵이 되면 온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여 놓고 그 자취를 감추는 식이다. 폭설이다 보니 아침 일터로 향하는 어른들에겐 발목을 잡아채는 성가신 눈일 뿐이다. 게다가 좀처럼 동장군(冬將軍)의 당당한 기세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매서운 추위…. 하지만 잠시 우리 아이들의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면 거기엔 신명 넘치는, 천국 같은 세상이 열려 있다. 실로 오랜만에 즐겨보는 눈싸움이나 대나무 스키, 꽁꽁 언 빙판 위에서 달려보는 썰매타기, 제기차기 등등.
경남 함양군 안의면 이전리 솔숲마을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냄새 물씬 나는 정겨운 광경이다. 이에 덩달아 신명이 넘치는 또 한 사람의 '어른'. 수수깡 잠자리가 날고, 우뚝 선 장승들이 강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다송헌(多松軒)의 주인, 전래놀이 연구가 이철수 씨가 바로 그다.
2년 전, 이철수 씨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놀이 백가지’라는 제목으로 점차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전래놀이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총 350쪽 분량의 이 책에는 옛날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 직접 해봤음직한 놀이기구들을 그림과 사진으로 보여주며 놀이방법까지 꼼꼼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책은 이듬해 4월 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한국어린이도서상 저작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의 전래놀이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료 수집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이철수 씨. 그는 아직도 이 땅의 어딘가에 꼭꼭 숨겨져 묻혀 있을 전래놀이 발굴을 위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는 것을 마다 않는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 보면 옛날 당신들이 즐겨하던 놀이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면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요즈음 그의 손에서는 고구마와 옥수수, 꿀밤이 떠나질 않고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어린이 도서에 그림 자료로 사용될 작품들이다. 알이 까만 옥수수로 아프리카 토인 모양의 인형도 만들고, 곱게 물이 든 떡갈나무 잎으로는 그 인형에 예쁜 옷도 입혀줄 예정이다.
이처럼 이철수 씨가 만들고 재현해 내는 놀잇감엔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이 동원된다. 길을 가다가도 빛깔 고운 잎이나 열매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이 방면에는 예사롭지 않은 촉수를 지닌 것 같다고 아내 김근숙 씨가 옆에서 귀띔한다. 요즘 같은 한겨울에 쉬이 얻을 수 없는 짙은 초록빛깔의 풀은 얼마 전 부부가 부산을 여행하면서 길에서 뜯어 온 것이라고 했다. 이 풀들을 정갈하게 땋아서 옥수수 인형에게 옷을 해 입히면 예쁠 것 같다며 연신 흐믓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전래놀이에는 ‘우리’라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보다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요. 컴퓨터 게임이나 전자오락에 빠진 아이들은 그저 나밖에 모르게 됩니다. 친구들과 서로 돕고 어울리면서 놀이를 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지요. 전래놀이는 여럿이 함께 할수록 더 재미를 느낄 수가 있어요. 또 놀잇감을 직접 제 손으로 만들기도 하면서 창의적인 아이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철수 씨가 2년 전부터 전래놀이를 복원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 이유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안의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농업과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함양이라는 농촌의 학교 운동장에서조차 뛰노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자, 곧 마음을 다져먹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옛 놀이를 연구하면서 아이들이 꿈과 낭만을 키워갈 수 있는 일을 해 보자’ 라고.
처음엔 교직을 떠난다고 하자 아내 김근숙 씨가 극구 반대하며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뜻이 워낙 크고, 완강하자 아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안의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 역시 지금은 명예퇴직을 하고 ‘다송헌’에서 남편 일을 돕는 일등 내조자가 돼 있다. 전국 각지에서 하루도 거르질 않고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다과와 차를 끓여내고, 놀러오는 꼬마 친구들에게 귤 하나라도 먹여 보내는 일이 모두 김근숙 씨 몫이다.
이철수 씨는 내년쯤 서울 인사동에서 그 동안 작업해 놓은 장승들과 공예품, 전래놀이 도구 등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또 수년 안에 그간 복원해 놓은 우리의 옛 놀이들을 원형대로 고스란히 보존할 ‘전래놀이 박물관’도 세울 예정이다.
그와 함께 두어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오후 2시를 지나 따스한 햇살이 ‘다송헌’ 공방의 뜨락에 가득 퍼질 무렵이 되자 재잘재잘, 마실 온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보 <현대모터> 2001년 2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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