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2007년 10월,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다녀와서

어휘소 2008. 10. 12. 16:06

산행코스

설악동 소공원(5:00 출발)-비선대 휴게소 도착(5:40)-6:10까지 커피브레이크-

양폭대피소 도착(8:00)-9:00까지 아침식사-10:15 무너미 고개 -

온 길로 원점회귀-소공원(14:32) 도착

 

총 산행시간: 9시간 32분(식사 및 휴식 1시간 30분 포함)

산행거리: 총 16.6km


 

 

오르막. 양폭대피소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치면서

내 체력은 이미 절반 가까이 빠져나간 듯 느껴졌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내 뒤를 따르던 재로가, 배낭을 달라 한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는다.

나는 조금 더 버텨보기로 한다. 그렇게 얼마쯤 더 나아가자 이번엔 알 형이다.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하 세월일 거라 여기셨던지 대장님의 불호령^^이다.

 

“오솔길, 배낭 벗어라!!”

산행대장의 위엄 섞인 그 명령을 거부했다가는,

산악회에서 퇴출당하는(체력도 부실한 주제에 '대장명령불복종죄' 뭐 이런 죄목으로다^^)

불명예를 당할지도 모르겠다싶어 냉큼 배낭을 벗는다.

 

배낭을 받아들던 동기 재로가 한마디 한다.

“뭐, 별로 안 무겁네….”

조금은 풀려있던 내 다리에 다시 힘이 붙는 듯하다.

‘그래도 내려놓으니 이리 다르네...’.

나는 속으로만 웅얼거릴 뿐이다.

내 걸음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오르막의 막바지. 알 형과 재로, 그리고 나는

돌계단 등산로를 벗어나 낙엽이 수북이 쌓인 언덕배기를 가로질러

무너미 고개에 오른다.

관목의 잔가지들을 헤치며 오르는 파르티잔^^ 산행.

잠깐이지만 이거 스릴 있다.

 

그런데 앞서간 대원들이 보이질 않는다.

삼거리 쪽에 자리를 잡고 쉬는 모양이다.

알 형이 되돌아가 대원들을 모셔온다.

그들을 맞으며, 나는 한마디한다.

 

“왜 이제들 와요. 난 버얼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구만....” ㅎㅎ


이번 산행, 내 1차 목표는 물론 공룡 등에 올라타는 거였다.

하지만 체력이 안 되면 희운각 대피소까지만 가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내 나름의 목표를 세웠었다.

 

공룡 가는 갈림길.

그 지점에서 (우리산악회의 느림보이자 부실대원, 이라기보다는

이건 다리 짧은 짐승의 비애라고 해야 더 옳다)

나는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뒤로 돌아갈 것인지 판단해야 했다.

천천히, 함께 가보도록 하자는 대장님의 권유를 뒤로 하고,

나는 양폭 대피소 쪽으로 마음을 정한다.

 

내게 함께 가 보자던, 초행길의 뜬구름은

공룡능선에 들어선 지 채 5분도 안 돼,

‘오솔길이 되돌아갔길 천만다행이네’ 했다 한다.


공룡능선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길.

나는 어느 사람의 산행기에서 보았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로 한다.

산행을 진정으로 잘하는 사람은,

산에서 ‘끝까지 안전하게 내려오는 사람’이다.

하여, 나 오솔길은 누구보다 산행을 잘하는 사람이다, 고 감히 자부한다.^^

 

 

본진이 공룡으로 떠나고, 뒤돌아 몇 걸음을 옮겼을까.

3~40대쯤으로 뵈는 남자 산객이 내게 물어온다.

 

“공룡능선에 바람이 많이 불던가요?”

 

공룡 쪽에서 걸어오니, 당연히 그 길을 거쳐 왔을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솔찮이 불던데요.” 하며 눙치려다가, ^^

나는 이내 예서 되돌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이 눈엔 그래도 내가 ‘일반인’이 아니게 보였나 보네” 하며 피식 웃는다.

출발하기 전, 나는 우리 산악회의 공룡 산행기 말고도

몇 개의 산행기를 더 검색해 두었었다.

그 중, 어느 사람의 산행기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일반인’은 함부로 들어서선 아니되는 코스라고...

그곳의 8부 능선 어디쯤에서 ‘일반적으로’ 지쳐 탈진하기 십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그곳에 들어가고 말리라 또 작심한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하루 묵으며, 체력을 비축하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나는 무너미 고개를 천천히 내려선다.

뒤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산객들에게 길을 내어주면서 여유도 부려본다.

정기산행 때마다 내가 해야 했던,

앞서가는 대원들과의 거리와 시간차를 좁혀야 한다는

강박에서 놓여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날 설악을 찾은 등산객은 모두 1만 7천여 명 정도란다.

마포나루 형처럼 오색을 출발, 대청과 중청 코스로 내려오는

산객들로 하산코스는 인산인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양폭대피소 바로 위의 가파르고, 일부 가로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철 계단에 이르러서는 아예 행렬이 꼼짝 않고 서 있다.

 

부상당한 철 계단은 여기저기 흰 밧줄로 포박당해 있다.

간간이 오르는 산객들과 뒤섞여 한 줄로 오르내리자니

극심한 병목현상이 나타난다.

산객들 일부가 기다리다 지쳐 계곡 쪽으로 내려선다.

이를 제지하는 관리공단 직원들과의 실랑이 소리, 호루라기 소리로

계곡이 한동안 소란스러워진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양폭대피소.

계곡엔 아침식사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울긋불긋 가득 차 있다.

비선대까지 그냥 쭈욱 내려가자니 허기질 것 같았다.

나는 매점에서 초코파이 한 개와, 몸을 녹일 따뜻한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다.

아침, 오들오들 떨면서 얼다시피 한 김밥과 컵라면을 우겨넣던 거에 비하면

추위는 그닥 견딜 만했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갔다는 아침 시간,

그냥 형이 선물하신 제트보일은 컵라면의 물을 끓인 후 바로 ‘화로’로 활용되었다.

가스가 얼었는지 화기는 약했지만, 언 손을 녹이기엔 그만이었다.

누구보다 얇은 채비의 복장으로 덜덜 떨던 대장님은,

왕눈 형의 일곱 번짼지, 여덟 번짼지의 겉옷 재킷을 빌려

겹쳐 입고서야 비로소 평온을 되찾는 눈치다.

 

오후 들어서도 초강력 태풍을 방불케 하는 바람은 여전했다.

양폭에서 내려오며 나는,

공룡능선에서 누군가 이 바람에 속초 앞바다까지 붙들려 가지나 않았을까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곡 쪽에서 강한 바람이 휘돌아 나올 때면, 나 또한 휘청거리며

철교와 나무다리의 손잡이를 무섭게 움켜쥐어야만 했다. 

 

 

처음 가보는 길.

천불동 계곡은 아름답고, 웅장했다.

하늘 높이 솟구친 채로, 텅 비어 있는 기암절벽은

그 풍모 그대로 위풍당당했으며,

간간이 새빨갛게 혹은 노랗게 물들인 계곡은

우리들의 발걸음을 자꾸만 느리게 잡아챘다.

풍경 좋은 포인트에 닿을 때마다, 왕눈 형은 카메라를 든 멍게를 불렀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는 한 번씩 사진을 찍어줘야 하는 거샤."

멍게는 툴툴거리면서도, 왕눈 형이 주문하는 대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옛말에 ‘3대 독자는 절대로 이곳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했을 만큼

위험한 등로였다는 천불동 계곡.

이젠 9대 독자, 아니 나 같은 불량체력을 가진 이도 맘껏 뛰어다녀도 좋을 만큼

등산로는 튼튼한 나무 데크와, 계단으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을 오르면서는 마음이 바빠 걸음을 재촉하느라,

미처 다 둘러보지 못했던 절경들을,

내려오면서 찬찬히 음미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천불동 계곡의 그 아름다움도

혼자 터덜터덜 내려오자니

비선대까지가 마치 ‘천리만큼’ 멀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새벽 5시. 사위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채 그대로다.

신흥사를 지나, 돼지맘 언니와 보폭을 맞추며 쭈욱 걷고 있는데

뒤에서 알 형이 부른다.

언젠가 본 산행기에서, 이 방향(울산바위)으로 잘못 들어

산행시간 30분은 족히 까먹었었다는 멍게가

이번에도 '또' 그 길로 들어선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스쳐 앞서 나가던 두 여성 산꾼에게도

멍게는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뒤돌아서 우회전한다.

다리 위, 멀리 바라보이는 설악의 검은 능선들과,

무수한 별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계속해서 걷는다.

 

 

 

40분 만에 우린 첫 번째 목적지 비선대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알 형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가니,

하늘로 우뚝 솟은 바위의 중간쯤에

두 개의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거기가 금강굴이란다.

신새벽을 서두른 누군가 그곳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불빛은, 마치 바위에 아로새겨진 두 개의 별과 같았다.

 

이 이른 시각, 저 누군가는

왜 저 차디찬 바위의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걸까?

나는 뜬금없이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닿은 설악파크호텔 주차장.

오전에 먼저 출발하여, 내설악을 돌고 온 알 형과 재로가 ‘묵고’ 있는,

SM5 앞에 멍게 차가 멈춰 선다.

멍게 총무는 차에서 이 상태로 2시간 취침 후,

5시부터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라는 오늘의 산행지침을 우리에게 알린다.

 

차창 밖에선,

초겨울의 설악을 서성거리는 매서운 바람이, 으르렁대고 있는 게 느껴졌다.

 

2007년 10월 셋째 주,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