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간 속에서

우리것이 좋은 이유, 모시

어휘소 2008. 8. 29. 15:48

우리 것이 좋은 이유

 

모시


우리의 전통 옷감 가운데 섬세하고 청아한 멋에서 그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모시다. 질감이 깔끔하고 시원해서 여름 옷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땅의 자양분으로 키워낸, 자연 그대로의 토박이 천연 섬유이니 인체에도 전혀 해가 될 게 없다.

 

모시 짜는 일은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예로부터 모시 하면 으레 한산 모시를 떠올렸다. 한산은 충남 서천군 소재 지역으로 특히 이곳의 세모시는 올이 가늘고, 직조 상태가 고르며, 색깔이 백옥같이 희고 맑아 모시 중의 최고로 꼽혔다. 옛날에는 이 세모시 한 필을 물에 담갔다가 손으로 꼭 짜면 사발 안에 들어갈 정도로 올이 가늘다 하여 ‘사발모시’로 불렸다고도 한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로 시작되는 노래의 한 장면처럼, 세모시로 지은 여름 한복은 무엇보다 빼어난 자태와 단아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삼복더위를 물러서게 하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따를 소재가 없었다. 까칠까칠하면서도 땀을 잘 흡수하여 여름옷으로 지어 입으면 옷을 입지 않은 것보다 더 시원한 게 바로 모시옷의 이로운 점이다.

 

그런데 모시옷은 입고 있다 보면 어느덧 구겨지기 쉽다. 때문에 여느 소재의 옷보다 덜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시옷은 그 구겨진 모습조차도 그대로 아름다움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모자란 생각이다.

 

모시에는 연한 갈색의 생모시, 그 생모시를 잿물에서 표백하여 보드랍게 익은 모시, 생모시를 절반 정도만 표백하여 생모시보다는 보드랍고 익은 모시보다는 빳빳한 반저 모시로 각각 구분되어진다. 반저 모시라는 말은 요즘 들어 그 이름조차 잊혀져 가는 추세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사랑을 받았다.

모시는 자연색 그대로를 쓰기도 하지만 옷매무새에 개성이 강조되는 시기인 만큼 청색, 베이지 색, 노란 색, 가지색 등 천연 염료로 물을 들여도 멋스럽다. 혹은 새하얗게 탈색해 멋을 내기도 한다. 여기에 정교하게 수를 놓아 아름다움을 더할 수도 있다.


여인들의 정성스런 손길에서 태어나는 모시

그렇다면 선인들은 이 멋스럽고 또 실용적인 모시옷을 언제부터 입어 왔을까? 문헌상으로 모시가 삼베와 구별되어 기록된 것은 통일신라 때로 남아 있다. 또 <고려도경>에는 “여자의 옷은 흰 모시 노랑 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모시가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때 명나라에 모시가 공물로 제공됐다고도 적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연행일기(燕行日記)>, <연행록(燕行錄)>,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문헌에 백저포·세저포, 곧 모시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모시의 고장 한산에서는 예로부터 ‘모시를 삼지 못하면 시집살이가 고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시는 여인들의 정성어린 손끝에서 태어난다. 삼대에서 삼껍질을 벗기고, 째고, 이어 베틀에 걸어 짜는 모든 과정이 우선 여인들의 몫이다. 또 옷을 만든 후에는 빨고, 풀먹이고, 만지고, 다리는 정성까지. 모시옷의 태는 옷에 들이는 정성으로 가려지기 때문에 여인들은 한 시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모시옷은 반듯반듯한 올이 생명이기 때문에 빳빳하게 ‘쟁을 쳐서’ 짓는다. ‘쟁을 친다’는 말은 모시의 날올과 씨올이 직각으로 반듯반듯 만나고, 올 사이가 메임이 없도록 천을 다루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만 까슬까슬한 모시의 촉감이나 윤기를 돋워줄 수 있다. 모시옷은 물빨래를 하기에 그리 번잡한 옷은 아니다. 하지만 세제를 잘못 사용하면 탈색되어 제 빛깔을 잃기도 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현재 한산모시는 쉰을 훌쩍 넘긴 아녀자들의 공력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모시 짜는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이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는 ‘인간문화재’에 의해서만 모시 짜는 일이 재현되지는 않을는지…. 이런 저런 이유로 충남도에서는  ‘한산모시관’을 세워 인간문화재 나상덕 씨 등을 통해 모시 짜는 일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


새벽안개와 모시의 고운 결

모시삼기는 대개 인적이 드문 움집이나 토굴 등에서 해야 한다. 이는 모시 삼는 과정에서 여인들이 맨살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섬유의 올 끝을 마주 이을 때 무릎 위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작업을 해야 한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작업에 필요한 습도 때문이다. 모시굿(베틀에 걸기 전의 실타래 모양)은 건조하면 이음부분이 끊어지므로 모시 짜는 장소는 햇빛이 들지 않고 습도가 일정한 장소여야 한다.

모시풀(저마)은 대개 5월, 8월, 10월 일년에 세 차례 채취가 이뤄진다. 예전에는 채취에서 직조까지 한 집에서 전 과정이 이뤄졌으나 요즘에는 분업화되어 그 제작 기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요즘 들어서는 태모시 작업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의 절반 정도가 이미 진행된 모시굿을 사다가 짜기 때문에 모시 한 필을 만드는데 약 5일 정도가 걸린다.

 

이 5일이라는 기간은 장이 서는 날과도 일치하는데 서천군 한산 모시장(1일과 6일)은 새벽 4~5시경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희붐하게 새벽안개가 피어오를 무렵, 습기를 머금은 모시필을 백열등에 비춰봐야 진품을 가려낼 수 있다는 그 곳 사람들의 오랜 믿음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5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천 모시 문화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이 새벽 모시장의 장관을 지켜보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다녀갈 정도다. 한산모시 5일장은 여인들이 삼은 모시를 직접 머리에 이고 새벽길을 밟아 내다 팔아야 하기 때문에 ‘안장’이라는 별칭도 가졌다.

 

새벽장이 서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가 이렇게 새벽에 장에 다녀가야 또다시 모시 짜는 일에 정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래저래 시원한 모시옷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인들의 땀과 정성이 없이는 그 고운 결을 간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길쌈을 하면서 중머리 장단에 맞춰 베틀가를 부르는 아낙네들의 모습 또한 우리에겐 모시옷만큼 소중하고 값진 문화유산으로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신한생명 사외보  <내일을 사는 사람들> 2001년 7·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