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왕국' 건설한 월트 디즈니
귀여운 ‘생쥐’ 한 마리로부터 그의 도전은 막이 오른다. 그리고 그는 후에 세계 속에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바로 유년시절, 농장에서 함께 뛰놀던 동물들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던 월트 디즈니다. 미키마우스를 비롯해서 월트 디즈니가 창조해 낸 수 십여 종의 살아있는 캐릭터들. 월트디즈니사가 그 캐릭터들로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1백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다.
라이온 킹(1994년 작품)
언젠가 뉴욕타임스가 미국 영화 역사를 통틀어 흥행수입 최고의 영화 50선을 선정, 발표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월트디즈니사는 ‘라이온 킹’(5위), ‘알라딘’(16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21위), ‘미녀와 야수’(49위) 등을 상위 랭크 시키면서 애니메이션 만화영화 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난해 5월, 월트디즈니사는 ‘재미있는 기록들’이라는 제목으로 디즈니랜드와 관련된 자체 ‘진기명기 리스트’들을 공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디즈니랜드의 총면적은 3천554.3㎢로 샌프란시스코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직원 수(월트디즈니사는 이 직원들을 ‘캐스트 멤버’라고 부른다)는 5만 5천여 명으로 미국 내 단일 사업장 중 최대이다. 또 필름회사 코닥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아마추어 사진 중 4%가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98년 6월 24일자로 6억명째 관광객이 디즈니랜드에 입장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1/10이 디즈니랜드를 찾은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서부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테마파크 월트 디즈니월드, 미국 유수의 텔레비전인 ABC방송, 출판, 음악, 비디오 제작에 이르기까지 월트디즈니사는 지난 70여 년 동안 세계의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까지 언제나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다는 환상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 있다.
미녀와 야수(1991년 작품)
꿈, 믿음, 용기, 실천. 사람들은 월트디즈니의 이러한 신화 창조의 원동력에 대해 이 네 가지 키워드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나의 믿음에 견주어 본다. 그리고 다양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용기 있게 비전을 실천한다.” 생전에 월트 디즈니가 입버릇처럼 되뇐 말이라고 한다.
한 시골마을 농장주의 아들에서, 세계적인 만화영화 제작자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던 월트 디즈니.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느 날, 월트는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친구 아이웍스와 함께 자그마한 회사를 차렸다. ‘아이웍스-디즈니 커머셜 아티스트’, 창업을 위해 마련한 돈은 겨우 135 달러였다. 둘은 그 돈으로 채 한 달을 넘기기 못하고 첫 사업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 월트는 “최고 수준의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며 할리우드행 기차를 탔다.
영화제작자로서의 월트의 도전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늘날 월트디즈니사를 성공으로 이끈 실질적인 모태는 형 로이와 함께 만든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다. 그 곳에서 밤늦은 시각까지 일을 할 때면 휴지통으로 모여들던 귀여운 생쥐들. 월트는 이 생쥐 친구들에게 영감을 얻어 ‘미키’ 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함은 물론, ‘증기선 윌리’라는 영화를 통해 ‘미키’에게 목소리까지 선물했다. ‘미키마우스’의 휘파람 소리가 나오는 첫 장면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했다. 신출내기 영화제작자 월트와 ‘미키마우스’가 일약 할리우드의 새 주인공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1934년 월트는 할리우드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에 과감히 도전했다. 영화 전체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 첫 번째 장편 만화영화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였다. 1937년 첫 개봉되어 10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46개국에 배급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영화로 거둬들인 총 수입금은 800만 달러에 달했는데, 당시 극장 입장료가 몇 페니에 불과한 시절이고 보면 엄청난 성공이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고,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라는 갈채를 받았다.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월트 디즈니는 ‘피노키오’, ‘판타지아’, ‘밤비’ 등 히트작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애니메이션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변 장르에서, 새로운 중심 예술 장르로 변화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예술가로서, 창조적인 사업가로서 디즈니의 전설은 이어졌다. 1955년, 디즈니랜드가 문을 연 것이다. 월트는 이곳을 ‘영원히 막을 내리지 않고 진행되는 영화’에서 관람객 모두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날 개장식에서 월트는 “디즈니랜드에 온 사람은 모두가 우리가 초대한 손님”이라고 규정했다. 고객은 곧 ‘초대한 손님’이라는 이 말은 그 후로도 줄곧 디즈니사의 고객만족을 구현하는, 변하지 말아야 할 철학으로 남겨져 있다.
월트는 또한 사업가로서 일찌감치 파트너십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챈 최고경영자였다. 친구 아이웍스와의 만남이 그러했고, 형 로이와의 파트너십이 없었다면 오늘날 월트디즈니사의 캐릭터들은 아마도 월트의 상상 속에서만 머물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디즈니랜드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자 ABC방송국의 투자 유치는 물론이고(ABC는 95년 디즈니사가 인수했다), 코카콜라·코닥 역시 디즈니랜드 내 독점판매권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후원자로 만들었다.
이는 월트가 1966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이후, 1971년 개장된 디즈니월드에서도 역시 거대기업 엑슨(Exxon), AT&T, GM에게 실험적 미래도시 EPCOT에서 가판점 시설을 제공하는 협정을 이끌어내는 시금석이 됐다. 이러한 월트의 전략적 제휴 정책은 해마다 디즈니사의 금고를 가득 채워주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곤 했다.
평생 동안 29개의 아카데미상, 4개의 에미상 등 약 7백 개 이상의 상을 받은 월트 디즈니.하지만 그는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상은 내가 그 동안 해온 작업을 대중이 좋아하고, 인정한 바로 그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트가 일궈 놓은 디즈니사의 전설은 형 로이마저 세상을 뜬 이후, 1984년 영입된 CEO 마이클 아이스너와 그의 ‘드림팀’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현대증권 사보 <You First>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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