휙(Swoosh)!, 단돈 35달러의 위력
아름다운 정원과 호수, 그리고 육상 트랙에서는 셔츠 바람에 운동화를 신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볼 수 있는 곳. 미국 포틀랜드 인근 비버턴의 나이키 본사 캠퍼스의 정경이다. 이 조깅하는 무리들 속에는 육상 선수 출신으로 세계 제일의 ‘스포츠용품 기업’을 일궈낸 창업주 필 나이트 회장도 물론 빠지지 않는다.
필 나이트는 뛰면서도 고객을 만나면 ‘그가 나이키 제품을 입고 신는지, 나이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묻곤 한다. 그는 곧 “나이키의 제품개발은 연구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객의 마음이 그 출발선이자 결승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한다.
연간 1백억 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나이키 사. 내로라하는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가 선택하고, 스포츠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나이키 로고가 거둬들인 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 나이트가 이 상표 로고를 의뢰하는 데 들인 비용은 단돈 35달러였다. ‘V’자를 부드럽게 뉘어놓은 듯한 나이키의 상징 “Swoosh(‘휙’ 이라는 뜻)”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날개처럼 세계적인 스포츠용품업계의 진정한 승자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다.
오리건 주립대학과 스탠퍼드 경영대학원(그는 신발 시장을 주제로 MBA 석사 논문을 썼다)을 졸업한 필 나이트는 일본을 여행하던 도중 한 신발회사의 사장을 만나면서 기업경영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블루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라는 작은 회사를 만들었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경기 이벤트 때 트럭에서 러닝슈즈를 파는 정도였다. 첫 해 판매 성과는 8천 달러, 그리고 순익은 250 달러에 불과했다. 오늘날 나이키의 성과와 견주면 참으로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 후 스포츠화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 필 나이트는 회사의 이름도 나이키로 바꾸었다. 오리건 대학 시절 육상 코치였던 빌 바우어만이 함께 했다. 이제 스포츠용품업계에서 나이키의 숨 가쁜 질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때마침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깅의 열기가 한창이던 70년대 미국에서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는 곧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신발에서도 ‘나이키의 제품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필 나이트의 신념은 광고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나이키를 운동화가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운동화를 사도록 만들었다. 전문직 여성 뉴요커가 출근길에서는 나이키 조깅화 차림으로 달리다가,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하이힐로 바꾸어 신는 장면을 미국인의 뇌리 속에 각인시켰다.
80년대 들어 나이키가 연출한 최고의 걸작은 단연 농구의 황제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과의 만남이다. 80년대 초반 미 대학농구의 최우수 선수였던 조던을 나이키의 광고 모델로 ‘모신’ 것이다. 나이키는 마이클을 위한 신발을 디자인했고, 그것을 ‘에어 조던(Air Jordan)'이라고 불렀다. 당시 NBA 코트에서 마이클 조던이 신던 검은 색상의 ‘에어 조던’은 사실 불법이었다. 하지만 조던은 한 게임당 1천 달러의 벌금을 물어가며 계속해서 ‘에어 조던’을 신었고, 그를 추앙하는 팬들의 마음을 나이키 매장으로 달려가게 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 즈음 나이키의 매출은 연간 8억 달러 규모에서 40억 달러 규모로 수직 상승했다. 나이키 스포츠 마케팅의 대성공이었다.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마이클 조던에서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까지 나이키는 운동화에 인격을 불어넣는 전혀 새로운 범주의 제품을 탄생시켰다”고 입을 모았다. 그린 위에서 멋진 퍼팅을 성공시킨 뒤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는 타이거 우즈의 환호와,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덩크슛 장면과 나이키 로고는 자연스럽게 동일시되어 전 세계 스포츠 애호가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나이키는 미국 광고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캠페인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스트 두 잇(Just do it)'과 ‘나는 할 수 있다(I can)'가 그것이다. 이들 캠페인은 새로우면서도 멋있고, 다소 당돌한 권유를 담은 슬로건으로 단연 주목을 받았다. 나이키 스포츠화는 지구촌 젊은이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캠페인이 전개됐던 기간 동안 나이키의 미국 내 스포츠화 시장점유율은 18%에서 43%로 올라갔고, 전 세계의 매출액 역시 1백억 달러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이로써 나이키는 이제 훌륭한 플레이를 원하는 스포츠맨과 스포츠 애호가들에게 뛰어난 기능을 제공하며, 만족을 주는 세계적인 고급 스포츠 브랜드로서의 이미지를 굳힐 수 있게 됐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이클 존슨이 신었던 ‘황금신발’과, 2천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메리언 존슨이 입었던 ‘속도복(swift suit)’은 나이키 스포츠 과학의 개가였다. 달릴 때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디자인된 ‘속도복’은 존스로 하여금 “달릴 때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키의 스포츠 마케팅은 단순한 스타 만들기를 넘어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
나이키는 현재 신발과 의류용품 분야 등에서 동종업계 최다수의 디자이너 확보와 최대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아웃소싱을 통한 나이키만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을 고집한다. 현재 전 세계에 110여 개가 넘는 영업망과 50여 개국에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 돈독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생산을 외주에 맡기는 대신 철저한 품질관리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업 30여 년 만에 나이키가 세계적인 스포츠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필 나이트 회장을 비롯한 나이키의 전 구성원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가꾸어 온 때문이라는 평가다.
현대증권 사보 <YOU FIRST> 2001년 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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