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건축가. 한일건설 메가로그 「Verace」김경수 사진
장독대가 있고 흙이 있는 마당, 일산 ㄱ자집.
조병수의 <건축만들기 Ⅱ> 사진.
공간은 그곳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사유 혹은 사색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건축가 조병수가 일하는 공간에 가 보면, 그가 만들고자 하는 건축과 공간에 대한 미학이 오롯이 전해져 온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의 옥상. 그곳엔 두 채의 건물 사이로 나무 데크로 만든 빈 마당을 들여놓았다.
봄볕 따사롭던 어느 봄날, 그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들어섰을 때, 건축가는 그 마당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 한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 빈 마당의 입구 한켠에는 이끼를 품은 키 작은 고목이 한자리를 차지했고, 외곽 화단에는 식물들이 봄기운에 한창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건축가는 그 빈 마당을 바라보고, 또 일을 하면서 비가 오면 그 빗방울 소리를 음악처럼 즐길 것이고, 또 달빛 쏟아지는 날이면 그 환한 달을 마중할 것이다.
그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건축의 출발은, 유년의 외갓집 한옥의 마당에서 뛰놀던 오래된 정서에서 기인한 것이었노라고. 유년시절의 그 경험은 건축가에게 공간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해 주었노라’고. 그에게 잘 지어진 건축이란, 이처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능과 요구에 무엇보다 충실한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에 주목하는 것. 이것이 조병수 건축가가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 건축의 정신이다. 삶, 그 자체보다는, 그 삶을 담는 그릇의 표피나 공간구성 테크닉에 더 관심이 컸던 건축. 하지만 그에게 건축은 단순하더라도 주변과 잘 조응하고, 삶이라는 프로그램에 충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건축철학이 녹아든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1993년 맡게 된 첫 번째 프로젝트다. 그가 주목한 곳은 ‘정릉과 창신동, 신당동’의 산동네였다. 그는 16년 전의 정릉은 “사람들의 온기가 가지처럼 뻗어져 있는 길로 모여져서, 혹은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혹은 아래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른바 달동네의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있던 골목길과, 늘 열려 있던 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이렇듯 그의 건축의 출발은, 달동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초창기 그의 건축에 대해 기교를 한껏 부린 고려청자나 백자보다는, 실용의 미를 갖춘 ‘막사발’을 닮았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그가 유학한 몬태나 주의 영향도 컸다. 한창 도예에 빠져 있던 그가 건축 공부를 위해 선택한 곳이 미국 북서부의 몬태나 주립대학이었다. 그는 한때 마크 트웨인이라는 작가의 열렬한 독자였고, 미시시피 강이 흐르는 미국 북서부로 <허클베리 핀>의 주인공처럼 유학을 떠났다. 몬태나에서의 생활은 건축가로서 그의 기초를 견고하게 해 주는 주춧돌이 되어 주었다. 농부들의 마음을 담은 실용적이고, 솔직하고, 소박한 건축에 그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서 목격했던 전원의 풍경들과 건물들은 그에게 소중한 건축설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몬태나 주립대에서 그는 건축가 인생의 첫 번째 스승을 만났다. 봅 싱어 건축학과 학과장이다. 그가 졸업식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발 뻗고 잘 곳이 없거나, 열악한 환경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가, 책임 있는 건축가가 돼라’는 주문이었다. 오는 9월, 제자의 초청으로 봅 싱어 교수가 처음으로 한국에 오게 된다며 그는 설레듯 전했다. 몬태나 대학의 스승에게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배웠다면, 도시설계학과 건축학 석사과정을 마친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는 건축의 실질적인 과정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스승, 라파엘 모네오와의 만남이 하버드에서 이뤄졌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이론이나 연구보다 건축의, ‘실질’의 아름다움에 대해 배웠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는 방송인 황인용 씨의 '카메라타' 음악감상실, 두 상자 집, 세 상자 집, 경기도 양평 수곡리의 ㅁ자 집. 강원도 화천에 있는 소설가 이외수의 집필실.
단순미의 박스형 건축을 추구해온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박스형의 구조라 할지라도 건축물과 주변과의 관계, 그 연계를 중시한다. 하늘과 땅, 자연과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상자로 표현하는 단순한 작업을 통해 그는, 건축의 원초적인 공간성과 그 원형을 찾곤 한다.
그와 만나던 날, 필자에게 그는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지난 2006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만든 책이다. 제목은 <물성에 대한 탐구>. 학생들이 건축물을 설계하면서 관심 있는 재료들을 먼저 선택하게 한 뒤, 오브제를 만드는 작업을 수업으로 진행한 결과물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요즘은 건축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프로세스들이 간과되거나, 그 순서가 뒤바뀌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다며 아쉬워한다. 무엇보다 좋은 건축이 이뤄지려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재료, 곧 물성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하지만 요즘엔 그 과정을 소홀히 여기곤 한다는 지적이다.
일산 ㄱ자집.
조병수의 <건축만들기 Ⅱ> 사진.
“우리의 기억 속의 집, 집들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재료를 썼느냐 하는 것보다 그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는지,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하늘과 땅과 풀내음, 별빛 등과 더불어 얼마나 더 자연에 가까이, 그리고 이웃과 함께 호흡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줄 것인지가 집을 짓는 데 있어 더욱 중요하지요.”
그는 또 덧붙인다. 건축이란, 자연과 인간의 범위를 한정하고, 엮어주는 것. 건축가는 거기에 사람들이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을 더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1996년 중반, 그가 지어 유명해진 ‘평창동 一자 스튜디오 주택’은 그의 이러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사람이 있어야 할 본연의 위치인 자연과 건축 사이로 사람을 되돌려 주고, 그 속에서 살며 쉬고, 때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을 창조해 냈다. 같은 시기, 그가 지은 ‘일산의 ㄱ자 집’ 역시 마찬가지다(이 집은 지난 1백년 간 가장 영향력 있는 7개의 주택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그 옆으로 수도가 있고, 장독대가 있고, 창고가 있는 집. 마당에는 흙이 있어 비가 오면 흙냄새가 나는 집. 건축가 조병수가 추구하는 자연과 사람을 담는 그릇, 곧 건축이다.
그는 여유로운 시간이면 곧잘 노자의 <도덕경>을 펼쳐들곤 한다. 그가 노장사상을 선호하고 또 옹호하는 이유? 그건 제도적이지 않고, 그래서 또 거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어느 건축비평가는 조병수의 건축에 대해 ‘거칢 속의 세련, 세련 속의 무심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또 이런 비평도 있다. ‘그의 건축은 한국적인 감수성에 기초하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함께 지닌다’고. 이를 뒷받침하듯 그는 미국의 건축 잡지 <dwell>지에 의해 세계 3인의 개성 있는 컨템포러리 디자이너로 소개된 바 있다. 또 미국 <Architectural Record>에서 선정한 세계의 선도적 건축가 11인에도 포함되었었다.
“저는 음악도 심포니 보다는 솔로 곡을 즐겨 듣습니다. 그림도 정통 문인화 보다는 몇 개의 터치로 끝나는 선(禪) 그림이나, 형편없는 필법으로 그린 민화를 더 좋아하고요. 도자기도 청자의 섬세함 보다는, 백자의 담백함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는 요즘 집을 설계하는 일 외에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거부문 큐레이터로도 활동하면서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오는 9월에 개막될 제3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더할 나위 없는, 집’에서 그가 기획한 테마는 한국민간 정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소쇄원’이다. 이 정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이었다. 건축가인 그가 천착해온, ‘마당’에 대한 공간미학이 수백 년 동안 원형을 잃지 않은 채 이어져온 곳이다. 그는 이번 디자인비엔날레에서 소설가, 시인,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을 초청하여 소쇄원에서 받은 영감과 아이디어로 탄생된 작품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조병수의 <건축만들기 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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