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녀왔습니다

예향의 문패, '말글살이 뜨락'- 목포 영흥고

어휘소 2008. 8. 27. 11:06

 떠들썩한 교실

 

 

 

오감 자극 입체수업으로 모두 ‘시인’되기

 


 

‘예향’이라는 수식어를 나란히 함께 써야 비로소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 곳, 남도. 시·서·화의 경계를 고루 넘나들던 예술가들이 유독 많았던 옛 예인들의 탯자리. 언뜻 떠오르는 시인들만 들춰 봐도 강진 땅의 영랑을 비롯해 김지하, 고정희, 김남주, 황지우…, 그리고 더 멀게는 고산 윤선도까지. 걸출한 시인들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잉태했던 곳이 바로 이곳 남도 땅이다.


그 예향, 목포에 있는 영흥고등학교(교장 하민호)에서 그 시인들의 후예가 모여 시에 관한 수업을 했다. 시 낭송과 음악, 그리고 간간이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도 함께 곁들여 가면서.

공개수업이 예정돼 있는 교실로 들어서면서 짧은 순간 착각을 해야 했다. 교실에선 조용하게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 카메라에 담기로 한 수업이 국어과목이 아니라, 음악수업이었나?’ 하는 착각. 그때 문 앞쪽에 ‘국어과 교실’이라는 문패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바로 옆에는 더할 수 없이 고운 우리말로 아로새겨진 문패가 또 하나 걸려 있다.

‘말글살이 뜨락’.

과연 예향의 문패답다.


영흥고등학교의 국어수업은 타 학교와는 조금 색다르게 진행된다. 우선 ‘말글살이 뜨락’이라는, 국어과목 전용 교실을 따로 만든 것부터가 남다르다. 이 교실은 지난해 10월 국어담당인 임광찬 교사의 19년 교직생활의 오랜 숙원 끝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뜨락’에서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진지한 토의도 하고, 책도 읽으며, 또 흥미로운 놀이를 즐기듯 그렇게 국어수업도 이뤄지고 있다. ‘말글살이 뜨락’에서는 4∼5명이 한 모둠으로 앉아 수업이 진행된다.


음악이 흐르는 국어수업 시간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말글살이 뜨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선율에 이끌리듯 학생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자리를 메워갔다. 이번 수업은 3학년 8반 학생들과 함께다.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임 교사는 그제서야 음악의 볼륨을 낮춘다.

그리고 임 교사는 교실 한켠 화병에 꽂혀있던 갈대 한 송이를 빼어 들었다. 잠시후 맨 앞 모둠에 앉아 있는 한 여학생에게 다가가 건네며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유진아∼(애교 넘치는 소리로).”

“예∼ 선생님(역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여기서 임 교사의 예상은 예외 없이 적중한 눈치다. 유진이의 목소리에선 선생님이 그녀를 부를 때의 호감을 반영하듯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이 전해져 온다.

이번에는 다른 모둠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리고 한 남학생을 향해 차갑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역시 이름을 불렀다.

 

“김기영(아주 퉁명스런 말투로)”

“예(다소 기분 나쁜 목소리로).”

 

역시 예상했던 대답 대로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되돌아온다.

순간, 교실 여기저기에선 ‘킥킥’ 웃음소리가 번져간다. 이날의 4교시 국어수업은 이처럼 임 교사의 ‘짧은 퍼포먼스’로 막이 올랐다. 이날 공부할 단원은 시 . 그 중에서도 ‘시적 자아’와 ‘시적 어조’에 대해 익히는 게 오늘 수업의 학습목표다. 임 교사는 이날 공부해야 할 내용을 미리 이 같은 짧은 대화형식에 담아 재미있게 풀어가면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수업참여 의지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는 임 교사가 실천하고자 하는 교수·학습법의 요지이기도 하다. 때문에 학생들 앞에서 모노 드라마를 펼치듯 때로는 배우의 역할도 그는 마다 않는다. 교사의 그러한 노력들이 모여지다 보면 학생들에 대한 동기학습 거리가 그만큼 풍부해진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란 시의 작품에서 시인을 대신하여 말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때로 시인은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의 정감과 뜻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자기 고백적 시에서의 시적 자아는 시인 자신일 경우도 있다. 시적 자아 시적 화자 를 어떤 인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시인의 생각과 느낌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시적 자아’를 설명하면서 임 교사는 미리 준비한 시청각 자료들을 모두 동원한다. 임 교사가 지향하고자 한다는, 말 그대로 입체적인 수업방식이다. 교실에 들어서면서 마주한 감미로운 음악을 통해 오늘 수업의 주제를 조금은 예견할 수 있었듯, 이번에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미리 저장해 놓은 수업자료들을 불러내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칠판 옆 대형 모니터에는 이 고장 목포 출신인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검색돼 올라와 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자, 이 시를 각자의 ‘시적 어조’로 승화시켜 낭송해 보기로 하자. 자, 먼저 유진이 버전으로 들어 볼까?”

낭랑하고, 청아한 유진이의 ‘어조’로 시가 낭송되었다.

“그럼 다음은 누구 버전으로 낭송해 볼까?”

“기영이요!” 

 

임 교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친구들 다수의 이구동성 추천을 받으며 이번에는 기영이가 자리에서 호기롭게(?) 일어섰다. 기영이 특유의 목소리를 통해 그 나름으로 새롭게 해석되는 시 〈타는 목마름으로〉. 그런데 기영이는 아무래도 친구들로부터 뽑혔다는(?) 사실에 조금은 긴장한 것 같다. 몇 행을 읽어 내려가더니 이내 떨리는 듯 낭송을 더듬어 친구들의 웃음을 더는 참지 못하게 한다.


 

시인의 육성으로 듣는 ‘시적 어조’


“〈타는 목마름으로〉는 80년대 민주화의 물결이 한창일 때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많이 애송되었을 정도로 아름답고도, 강한 저항 정신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표현하려 했던 주제를 생각할 때 유진이와 기영이의 ‘시적 어조’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힘있고, 강하게 읽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번엔 임 교사의 시 낭송이 시작되었다. 암울했던 세상을 깨쳐 나가기 위해 안간힘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노여움,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 세상으로의 희원을 담은 듯한 임 교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메워 갔다. 일순간 교실 안은 숙연함마저 감돈다.

하지만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 낭송의 하이라이트는 그 다음 순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김지하 시인의 녹음된 육성으로 시 낭송을 듣는 시간이다. 직접 시를 쓴 시인의 음성으로 듣는 것만큼 그 시를 이해하는데 더 이상 완벽한 ‘어조’는 만날 수 없는 까닭이다.

 

“어조란 시에 드러난 목소리이다. 곧 시적 대상에 대해 ‘시적 자아’가 드러내는 태도를 말한다. 어조는 시적 분위기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주로 시어와 종결어미에서 나타나므로 주목해야 한다”는 임 교사의 설명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수능에서 곧잘 출제된다는 첨언도 빠트리지 않고.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향수〉(정지용) 등, 시 속 화자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기 위한 학생들의 시 낭송은 몇 편 계속 이어진다. 이어 모둠별로 교실이 떠나갈 듯 우렁차게 낭송한 시는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시 낭송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다시 과제가 주어졌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껍데기’, 혹은 시를 읽고 난 후 개인적으로 지목하고 싶은 ‘껍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학생들이 잠시 주어진 과제를 생각하는 동안 교실 안은 다시 조용한 음악으로 감싼다.


시어 ‘껍데기’에 담긴 생각, 생각들


“자, 시인이 말하려고 했던 껍데기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 세상의 추잡한 것들, 그리고 허위의식입니다.”

 

남학생들로 짜여진 네 번째 모둠에서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작가가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 그리고 만약 70∼80년대 시인이 이 시를 썼다면 껍데기는 분명히 군사정권을 지칭했을 것이라는 대답은 세 번째 모둠에서 나왔다. 또 어느 모둠에선가, “요즘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무슨무슨 게이트’요” 라고 했다가 교실 안은 다시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이 여세를 몰아 시어 선택에 대한 임 교사의 익살 섞인 강의는 계속됐다.

 

“가령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 라고 노래하지 않고, ‘껍데기는 가시옵소서’ 라고 노래했다면 시는 어떻게 들릴 수 있을까?”


임 교사가 선택한 이 터무니없는(?) 시어에 교실 안에서는 또 다시 폭소가 터진다.

이처럼 ‘말글살이 뜨락’에서 진행된 모든 수업의 내용은 인터넷의 ‘사이버 국어 교실’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임 교사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http://8733.netian.com 에 차곡차곡 자료들이 기록·저장되고 있는 것이다. 수업 자료, 교사 자료, 학생 자료, 수행평가 자료, 뜨락 활동 등 그 내용은 놀랄 만큼 방대하다. 또 이들 자료들은 누구든지 필요하면 검색해 볼 수 있도록 모두 공개된다. 특히 학생들의 그날그날 예습 복습에는 더 이상의 자료가 필요 없을 정도다.


이 수업 내용의 DB화 작업은 사실 지난 3년여 전부터 임 교사가 하루 몇 시간씩 잠을 손해보면서 꼼꼼하게 준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대한 수업 자료 덕분에 올해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펴낸 대안 교과서 《우리말 우리글》에는 임 교사도 공동집필진으로 함께 참여했다. 또한 그의 끊임없이 독창적인 교수·학습 방법이 ‘전국국어교사모임’ 내에도 꽤 알려지게 되면서 임 교사는 요즘 전국에 연수 강의 다니느라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발간 <교육마당 21> 200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