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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제이 싱’ 박노석 프로, "이제 두 자릿수 승 채워야지요!!"

어휘소 2009. 7. 28. 18:43

 

                                                                                                             ⓒ 오솔길

 

 

‘한국의 비제이 싱’, 박노석 프로

 

“17위를 하고도, 얼마나 기쁘던지…….” 그로서는 우승만큼이나 값진 결과였다. 금호아시아나 오픈 17위. 팔꿈치 부상으로 수년간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그에게, 올 상반기 최고 성적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또 표정에서 그때의 기쁨과 안도감이 절로 느껴졌다. 1993년 8월, 프로 데뷔 후 통산 7승(97년 아시안투어 필립모리스 대회 우승도 포함해서다). 그런데 그의 우승 행진은  2005년 에머슨퍼시픽 오픈 이후 ‘잠시 멈춤’ 상태다. 그간 팔꿈치 부상의 통증이 심해지면서, 대회 때마다 베스트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조건부 시드로 출전권을 갖게 된 올해 한국프로골프 코리안투어. 그는 지난 어느 해의 우승 기록보다도, 올해 달성했던 이 최고 성적에 감사해 하는 중이다. 스무 살 늦은 나이에 처음 골프를 배우기 시작, 6년 만에 프로에 입문한 박노석 프로(42세. 천호골프연습장).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경기도 광주 뉴서울 CC. 이곳 클럽하우스 뒤켠에 최근 그의 이름을 딴 골프 학교가 새로 문을 열었다. ‘박노석 골프아카데미’다.

 

“개장하고 난 후 지인들로부터 못다 이룬 두 자리 승수 언제 채우려고 새로 일을 벌이느냐며 인사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골프아카데미 운영하면서도, 계속해서 투어에 나갈 거고, 또 승수도 반드시 쌓아갈 겁니다. 10년 후에도, 또 그 후에도 시니어 투어 선수로 뛸 거고요. 이젠 골프엘보도 말끔해졌으니, 더 열심히 공 쳐야지요.

 

좀 더 안정적인 프로생활을 위한 보험을 들 듯, 박노석 프로는 지도자의 길도 일찌감치 모색해 두었었노라 했다. 하지만 그를 아끼는 몇몇 지인들은 그가 사업에 전력투구하느라 필드에 설 기회가 줄어들진 않을까, 그런 염려도 하는 모양이다. 그는 그러한 우려를 잠재우기라도 하듯, 앞으로 두 자릿수 우승을 꼭 채워가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면서 지난 4년여에 걸쳐 준비한 골프아카데미지만, 아직 마음만 분주하여 이렇다 할 홍보도 제대로 못한 상태라며 요즘의 근황을 전했다. ‘박노석 골프아카데미’의 문패를 달 웹사이트 구축도 현재 한창 진행 중. 내년 초쯤이면 선뵐 예정이란다.


3년 동안 싸운 골프엘보, 물리치다

 

마침 그와 만나던 날은 지은희 선수가 미 LPGA US오픈에서 우승하던 날이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한국의 여자 프로골퍼들이 미국서 세운, 3주 연속 우승 기록으로 옮겨갔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 선수들의 승부근성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이곳 골프아카데미에서도 미국 무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을 쳐 내던 새내기 여성 프로골퍼와도 만날 수 있었다. 홍애리(20세) 프로다. 올해 프로에 입문했다는 그녀는 “스승님께 하나라도 더 배워서 몇 년 후에는 신지애, 지은희 선수와 같은 세계적인 골퍼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제자에게 주문하듯, 박 프로는 프로골퍼로서 갖추어야 할 정신력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박노석 프로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는 홍애리 프로           

        

 

“골프는 기초적인 토대가 갖추어진 다음부터는 본인의 의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스스로 하려는 의지와 정신력이 없으면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국내보다 선수층이 몇 곱절 더 두터운 일본이나, 미국 투어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 무대에서 경쟁하면서, 3주 연속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는 우리 여자선수들, 참으로 대단하다고 봐야지요. 역시 여자들이 힘이 더 세요(웃음).

 

이날, 박 프로가 후배 골퍼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던 당부가 하나 있었다. 운동선수라면, 특히 프로라면 자신의 몸 상태와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것. 지난 3년, 그 또한 팔꿈치 부상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였다. 그 부위의 통증은 2001년 무렵이 되면서 조금씩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하면서 투어에 참가했고, 부상은 악화되어 치료시기를 놓쳤다.

 

“보통 골프엘보는 치료와 휴식을 병행하면 3개월 내지 6개월이면 완쾌되지요. 그런데 한창 승률이 오를 때이다 보니, 테이핑하고, 혹은 주사 맞으며, 쉬지 않고 대회에 참가했어요. 후원사와의 계약조건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상을 숨기려 들지 말고, 드러내어 스스로 점검하고, 관리해야 해요.”


1997년의 영광, 그리고 좌절

 

이제 막 새로운 출발선에 선 그의 제자처럼, 박노석 프로에게도 십 수 년 전 그를 이끌어준 고마운 선배들이 있었다. ‘골프계의 히딩크’로 불리는 한연희 현 국가대표팀 감독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요즘도 자주 통화하며 안부를 주고받는 선배골퍼다. 박노석 프로가 골프를 막 배우던 연습생 시절, 필드 경험이 많지 않던 그에게 필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골프채를 잡은 지 4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어렵게 필드라는 곳엘 나가볼 정도였다. 그처럼 사정이 여의치 않던 연습생 골퍼에게 필드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곤 하던 선배가 한연희 감독이었다.

 

박 프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의 처지로서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던 필드경험”을 선배가 직접 선물해 준 것이다. 그때 선배들과 찾았던 골프장이 동서울CC. 당시 박남신, 강욱순, 임진한 선배골퍼들이 라운딩했던 그곳에서 그는 프로 첫 승에 대한 꿈꾸기를 시작했다. 그때 도움을 주던 또 한 사람이 있다. 변변한 지도자도 없이, 해묵은 골프잡지를 교재삼아 공부하는 후배에게 드라이버와 아이언샷 등 실전에 대해 아낌없는 지도와 조언을 해 주던 박남신 프로다. 그와는 필립모리스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우승을 놓고 격돌해야 했다. 박노석 프로는 “그때는 박남신 프로님과 같은 조에서 우승을 다툴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꿈결 같았던 대결에서 박남신 프로를 제치고, 그는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1997년은 박노석 프로에게 최고의 해였다. 데뷔 후 4년 만에 첫 승에다 3승까지 몰아서 쳤다. 제1회 SK텔레콤 클래식, 제3회 슈페리어 오픈, 그리고 아시안투어인 필립모리스 대회 우승이다. 그해 상금랭킹은 3위. 프로 입문 동기였던 최경주 프로가 그해 1위였고, 박남신 프로가 2위였다.

 

“데뷔 후 후원 소속사 없이 보내는 시간이 힘겨워질 무렵, 다행히 첫 승을 했어요. 프로골퍼에게 첫 승은 생활의 감로수 같은 존재예요(웃음). 그 전까지 톱10 진입은 많았지만, 우승하고는 별로 인연이 닿질 않았어요. 1, 2라운드 선두로 나서다가, 마지막에 우승을 놓친 적도 여러 번이고요. 결국에는 그런 다양한 실패의 경험들이 제게 스승이 되어 연이어 3승까지 몰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97년엔 그에게 좌절의 뼈아픔도 있었다. 3승의 자신만만함으로 일본투어에 도전했지만, 정규투어 시드 확보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2부 투어로 내려가야 했지만, 당시 15일짜리 관광비자의 빠듯한 일정, 또 만만찮은 경비도 부담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일본 정규투어 시드권을 확보했다면, 그 다음 도전은 미국 투어였을 텐데, 박 프로는 이제껏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더욱이 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해 계약 소속사 문제 등이 차질을 빚으면서, 그는 해외진출의 꿈을 유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오솔길

 

  

‘한국의 비제이 싱’, 박노석

 

고진감래. 그의 우승행진은 다시 3년 뒤에 이어졌다. 2000년 제43회 랭스필드 PGA 골프선수권 우승. 또 다시 3년 후 2003년 삼성증권배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2004년 제이유그룹 오픈 우승 등 잠시 주춤했던 우승 퍼레이드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2005년을 다시 (현재까지는) 생애 최고의 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에머슨퍼시픽 오픈 우승과, 여러 차례의 아쉬운 준우승을 쌓으면서, 상금획득도 2위로 올라섰다. 이즈음 ‘박노석을 사랑하는 모임’.  그를 응원하는 온라인 팬 카페에도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SBS 최강전일 거예요. 최상호 프로님과 양용은 프로,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 연장전까지 가며 접전을 펼치자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었지요. 그때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 찾아오셔서 저를 응원해 주시곤 하셨어요. 매달 카페 회원들과는 오프라인서 정기모임도 갖고, 함께 모여 라운딩도 하면서요.”

 

팬들은 그를 ‘한국의 비제이 싱’이라 부르곤 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피지 출신의 골퍼 비제이 싱의 별명은 다름 아닌 ‘연습벌레’다. 싱은 유년시절 골프장에서 공을 주우며, 어렵게 독학으로 세계적인 골퍼로 성공한 보기 드문 케이스의 선수다. 자, 이쯤 되면 팬들이 박 프로에게 왜 그런 별명을 붙여주었는지 금세 수긍이 갈만하다. 프로골퍼로서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7승의 기록을 보유할 수 있었던 박노석 프로의 힘 역시 부단한 연습 덕이었다. 국내 골프잡지를 모두 섭렵하며, 다 닳아진 잡지를 보고 또 보면서, 스승 없이 골프 독학을 했었다는 배움의 과정 또한 서로 많이 닮았다.

 

“저처럼 단신인 선수는 특히나 체격과 체력 모두 외국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잖아요. 끈기를 잃지 않는 부단한 연습만이 체격 조건이 좋은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연습, 그리고 또 연습해야지요. 저는 다행히 어깨의 회전력이 좋아 드라이버의 비거리도 장신 선수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고, 지금은 좀 떨어졌지만, 한창 이길 때는 페어웨이 적중률도 높아 세컨샷 공략도 남들보다 쉬웠고요.

 

인터뷰를 마친 그가 김경수 사진가의 주문에 따라 드라이버를 집어 들었다. 경쾌하면서도 힘 있는 임팩트 소리와 함께, 긴 포물선을 그리며 흰 공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굿 샷!”

“어때요? 제 스윙, 아직 녹슬지 않았죠? 허허.”


<club KPGA> 2009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