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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KPGA 신인왕 김도훈 프로

어휘소 2010. 3. 30. 10:30

 

                              도산공원 앞에 있는 클럽하우스

                              '클럽 모우'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오솔길

 

 

2009 KPGA 신인왕, 김도훈 프로

 

 

“일본 접수하러 간다.”

지난해 말,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2010 시즌 퀄리파잉스쿨에 나가는 약관(弱冠)의 그가 던진 출사표는 이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낭보가 전해졌다. 최종 6라운드 결과, 그의 성적은 호언한 대로였다. 국내 참가선수 중 가장 좋은 4위(13언더파 419타). 이로써 그는 2010 일본프로골프투어 상반기 모든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시드를 확보했다.

그에게 경사는 또 있었다. '발렌타인 2009 한국프로골프(KPGA)대상' 시상식에서 그는 신인상인 ‘명출상’을 수상했다. 운동선수에게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밖에 수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더 가치 있는 상. 그 값진 상이 2009년엔 그에게 돌아갔다. 이 겹경사의 주인공은 지난해 코리안투어 11개 대회에 참가, 대회마다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아간 김도훈 프로(21. 넥슨홀딩스)다.

 

“일본투어는 전반기 경기를 치르고 나면 그 성적으로 후반기 시드가 재조정되지요. 올해 가능하면 상반기 경기에 모두 참가할 예정입니다. 일본에서 경기를 하면 부담감이 덜한 때문인지, 경기가 잘 풀리는 편이에요. 지난 12월의 Q스쿨에서도 그랬고요. 일본의 골프 환경 또한 주니어 시절부터 익혀온 터라 그런지 낯설지 않았던 것도 좋은 성적을 낸 요인인 것 같아요.”

 

김도훈 프로는 2007년 3월 프로에 입문했지만, 2008년까지는 1년에 서너 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리스트라는 화려했던 명성에 비하면 흡족한 성적은 아니었다. 아마 시절에는 대회에 나가서도 배운다는 자세로 임했지만, 프로가 되고 보니 도처엔 경쟁자들뿐. 직업선수이니 마음가짐도 달라져야 했다. 그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그는 이전의 페이스를 잃고, 자꾸 방어적인 모습의 골퍼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란다.

 

 

위기는 곧 기회다!

그런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려는 주문에서였을까? 인터넷 공간, 그가 꾸며놓은 작은 방 대문에는 이런 문구를 걸어두었다. ‘위기는 곧 기회다.’ 2008년 시드전은 그가 기억하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다. 마지막 3홀을 남겨두고서다. 남은 3홀서 연속 버디를 잡지 못하면, 시드전이 고스란히 날아갈 처지였다.

 

“15번 홀이었을 거예요. 티샷이 벙커에 빠지고 말았죠. 그것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턱 바로 아래였어요. 간신히 빠져나와 100야드 남겨두고, 깃대 가까이 어렵게 공을 붙일 수가 있었죠. 그 공을 못 넣으면 다음 시즌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버디에 성공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 홀도요.”

 

그 두 개의 버디가 그의 진로를 바꿔준 셈이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그는 “아래로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일어서는 일과, 위기 뒤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는 믿음이 확고해졌다고 했다. 프로 초년생으로서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귀한 공부를 한 셈이다. 그는 지난해 신인왕이 되었지만, 아쉽게도 생애 첫 승은 2010년으로 잠시 미뤄야 했다.

 

지난해 5월, 인천 스카이72 오션코스에서 있었던 SK텔레콤오픈에서 그는 3라운드까지 줄곧 1위 자리를 지켰었다. 그러다 4라운드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스카이72 오션코스 13번 홀은 그에게 비교적 쉬운 파4홀이다. 깃대에서 채 1미터가 안 되는 거리. 그는 이 쉬운 파 퍼팅을 놓쳤다. 선두와 한두 타 차. ‘버디 치고 가면 나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겠다.’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그가 우승 욕심을 내면서, 3일 동안 지킨 스코어는 그대로 잃고 말았다. 그는 이 대회에서 4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그가 거둔 최고의 성적이다.

 

기회는 9월에 다시 한 번 찾아왔다. 메리츠 솔모로오픈에서다. 그는 대회 사흘째 3라운드에서 버디만 5개를 뽑아내는 등 깔끔한 플레이를 펼쳤다. 4언더파 209타. 공동 2위에 1타 앞선 단독 1위였다. 전 날까지 1오버파로 28위에 머물던 그는 무서운 기세로 버디에 성공, 리더보드 맨 위에 이름을 올렸었다. 하지만 4라운드부터는 퍼팅이 좋지 않았다. 그는 3라운드까지의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최종 결과는, 6위로 내려앉아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프로에서는 우승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는 사실도 하나 더 배웠다고 했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의 ‘금빛 눈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은 그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경기로 남아 있다. 동명의 또 다른 김도훈(회원번호 753번)·강성훈·김경태 프로와 함께 일군 ‘금빛’ 성과였다. 역대 최강의 국가대표 팀이라는 기대 때문에, 선수들로서는 부담도 적지 않은 대회였다고 했다.

 

“시상식 날 태극기 올라갈 때는 눈물이 핑 돌기도 했어요. 아시안게임과 같은 국가대항 경기는 어느 선수 한 사람만 잘 쳐서는 우승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선수들의 팀워크가 굉장히 중요하죠. 대회 마지막 날, 전반 라운드까지는 타이완 팀과 한두 타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혼전이었어요. 후반 들어서면서 타이완이 무너지고, 우리 팀이 감격적인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게 됐었죠.”

 

김도훈 프로는 그 시상식의 감격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꿈꾸고 있다. 이 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골프에서 다시 한 번 그때의 영광을 재현해보고 싶은 까닭에서다. ‘아시안게임의 우승팀답게, 올림픽에서는 타이거 우즈가 나서는 미국 팀과 한 번쯤 겨뤄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는 마냥 신나는 눈치다.

 

아시안게임 팀 멤버였던 ‘753 김도훈 프로’와는 동명으로 인해 에피소드도 참으로 많았다. 두 김도훈 프로는 태어난 해도, 한자이름도 똑같다. 생일이 ‘752번 김도훈’ 프로가 두 달 빠른 정도. 2006 아시안게임에서는 이 두 달 차이로 인해 ‘시니어 김도훈’과 ‘주니어 김도훈’으로 각각 호칭되기도 했다. 연습라운드를 하러 가던 중 두바이에서 승무원이 같은 비행기 티켓이 두 장 연달아 나온 걸로 착각해 한 장을 찢어버린 건 잘 알려진 에피소드 중 하나. 선수단은 탑승 수속을 다시 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두 사람의 골프백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 친구와는 주니어 시절부터 함께 라운딩을 다녔어요. 국가대표 생활도 함께 했고, 프로 데뷔도 같이 해서 회원번호도 앞뒤로 붙어 있고요. 지난해 모 잡지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 중에 프로입문 이듬해 성적이 ‘753 김도훈’ 프로의 것으로 소개가 됐었죠. 2008년에는 그 친구보다 제 성적이 훨씬 안 좋았었거든요. 그런 기사들 보면서 ‘앞으로 좀 더 잘해 보자’ 자극을 받기도 해요.”

 

 

2010 일본투어 신인왕 연속 도전

김도훈 프로와의 인터뷰는 최근 도산공원 앞에 새로 문을 연 클럽하우스 ‘클럽 모우 서울’에서 진행됐다. 이곳은 주말에 클럽 모우 골프장(강원도 홍천 모곡리. 2011년 9월 오픈예정)에서 라운딩을 즐긴 고객들이 주중에는 도심에서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 이곳 2층에 꾸며진 라이브러리에는 오래된 골프관련 서적들과 비디오테이프 자료, 빈티지 골프클럽 등이 진열돼 있다. 김 프로는 이 자료들을 들춰보면서, 초등학교 시절 처음 골프에 입문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심심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보시던 레슨 비디오테이프를 즐겨봤어요. 지금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나는 건 리드배터 레슨 비디오예요. 그것을 보다가 직접 쳐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 골프를 배워보겠다고 부모님께 졸랐죠. 골프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반승낙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반대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께 울고불고 하며 매달렸죠.”

 

그 당시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는 게 어머니의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응원과 기대 속에 골프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하루 2시간씩 꼬박꼬박 연습했다. 그렇게 2년을 배운 뒤, 5학년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라는 걸 나갔다. 평소의 실력대로 82타를 쳤는데, 예선 통과였다. 본선에서는 6위. 그 후 그는 모든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대회에서 차곡차곡 쌓은 57점으로, 그는 처음으로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이는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로 이어지면서, 아마추어 골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까지 합작할 수 있었다.

 

김도훈 프로는 요즘 쇼트게임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호주로 다녀온 이번 동계훈련에서도 쇼트게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앞으로도 연습시간의 절반 이상은 퍼팅에 투자할 계획이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단기간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가 따로 있다.”며 운을 뗐다. 짧은 계획으로는 작년에 아깝게 놓쳤던, 2010년 투어에서의 생애 첫 승 신고식이다. 그리고 2009년 코리안투어 신인왕의 영광을 일본에서도 재현해 보이겠다는 각오다. 2년 연속 한일 양국의 신인왕이라는, 새로운 기록에 도전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가 호언했듯 ‘일본을 접수한’ 다음에는, 더 큰 무대인 PGA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Club KPGA> 2010년 3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