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엄정식 교수 인터뷰

어휘소 2008. 6. 26. 11:41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사람들은 묻는다. 인류와 함께 진보를 거듭해 온 과학기술,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과학기술을 만나 과연 행복해졌을까?

 

빛의 속도로 달음질치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시대에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이 물음에 대해 서강대 철학과에서 과학철학 강의를 맡아온 엄정식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과학기술이 현대인을 더욱 행복하게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욱 불행하게 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는 장차 과학기술의 진전과 함께 전개될 지도 모를 여러 가지 가정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결코 유보하진 않는다.

인간이 사용해온 과학기술이라는 도구가 어느 순간엔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고,

인간이 그 객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사유에서다.

 

가령, 누구든지 주문만 외면 척척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하나 있다 하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램프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램프에서 튀어나온 거인은 차츰 ‘주인님’의 주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태세다.

이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요술램프의 달콤한 마법 대신,

그 힘센 거인을 차츰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가 과학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며 과학기술의 발전양상과 인류의 행복,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며 자주 비유하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알라딘의 요술램프’ 이야기다.

철학자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면 자칫 과학기술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인간을 이 우화 속의 거인을 만나는 일처럼 만들지도 모른다는 경계인 것이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기심(機心)’ 또한 그러한 경계를 전한다.

한 마디로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심(機心)’은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쓸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무엇을 꾀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가르침을 일깨운다.

엄 교수는 제자들에게 철학도로서 강의실 내에서만이라도

이 ‘기심(機心)’의 경계를 한 번쯤 실천해 볼 것을 주문하곤 한다.

그 한 예가 리포트를 컴퓨터 대신 직접 손으로 쓰게 하는 일이다.

이 방식을 고집한 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인터넷의 여기저기서 타인의 글과 문장을 가져다 쓰는,

이른바 짜깁기식 과제제출의 부작용도 줄일 수 있었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과학기술의 세례. 그 속에서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지켜가자는,

‘기심(機心)’의 깨우침이 예비 철학자들의 학문 정진에 작게나마 보탬이 된 예라며 엄 교수는 웃었다.

하지만 ‘기심(機心)’에서 자유로운 강력한 자아만 확립되어 있다면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더없는 행복을 안겨주기도 한다.

 

“소설을 쓰는 제 아내(작가 우애령 씨)는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로부터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저와 반대로 컴퓨터가 아니면 소설이 써지지 않는다고 해요.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글감들을 육필의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내는 워드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글 쓰는 사람으로서 과학기술의 수혜를 고스란히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엄 교수는 과학사로 볼 때 뉴턴 이후 과학기술의 변화는 인간이 운용할 범위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고 전제한 F. 베이컨 당시만 해도

과학의 작동은 인과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예측도 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수반되는 역기능을 최소화할 수도 있었다.

곧 인간이 주체가 되어 다룰 수 있는 과학이었다.

게다가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제도 함께였다.

그렇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은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게 철학자로서의 그의 관점이다.

무엇보다 자연이 지니는 근원적인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사실 과학과 철학은 태생이 같습니다.

지적 호기심을 탐구하는 일은 최초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탈레스 이후

현대의 철학자와 과학자 모두에게도 공통된 사명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은 태생이 다릅니다. 과학이 인식론적 영역이어서 ‘그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다면, ‘기술’은 탐구의 성과를 현실생활에 유용하게 적용한 결과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따져야 하는 가치론적 영역에 있지요. 그렇다 보니 ‘기술’은 때로 정치, 경제는 물론

도덕적, 군사적, 심지어 종교적, 예술적 가치와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과학기술이 다시 과거 원시사회 상태로 회귀하면 인간은 행복할까?

엄 교수는 이에 대해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해법 역시 과학기술인 스스로 찾아야 할 몫이라고 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과학기술인들에게도 과학적 지식 외에

종교적, 인문적 직관이나 사명감이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좋은 담은 좋은 이웃을 만든다네’라고 노래한

R. 프로스트의 시를 들려주었다. 이젠 인문학자와 과학기술인이

‘담을 낮추되, 필요한 담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사회가 풍요로울수록 도덕적으로 더 타락하거나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제기되곤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말예요.

사회가 그러한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징후를 세상에 알리고 고발하는 이는

시인과 예술가들이지요. 하지만 그 징후를 냉정한 시선으로 진단하는 이는 과학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처방하고 예측하는 사람은 철학자와 윤리학자들입니다.

그 최종적인 치유는 종교가와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맡아야 하지요.”


엄정식 교수는 요즘도 틈만 나면 충남 당진으로 달려간다.

선친의 고향인 그곳에 농가를 하나 얻어 땀 흘리며 농사를 지어온 지 벌써 20년째다.

그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산책도 하고, 책도 읽으며

철학자로서의 사유의 지평을 넓혀왔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엮어 철학에세이 <당진일기-나 자신을 찾아서>를 펴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자신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느닷없이 정신을 가다듬고 그곳으로 향하곤 하는 그였다.

가끔은 철학교수들과 제자들이 동행하여 밤새워 토론하며 세미나를 하기도 하는 그곳에

은곡재(隱谷齋)라는 당호도 지어주었다.

철학교수로서 평생을 ‘자아 탐구’에 골몰한 그는 현재

‘인격적 자아가 집단적 자아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연구하고 집필 중에 있다.

그는 <민족적 자아론>이라는 책으로 엮일 이 논문이

‘철학자로서 분단된 조국에 바치는 서사시’가 되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 과기부에서 발간하던 뉴스레터

<과학기술혁신뉴스>의 인터뷰-서강대 철학과 엄정식 교수- 원고(200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