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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과학기술이 만났을 때....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 인터뷰

어휘소 2008. 8. 10. 12:48

 

 

소설 <25시>를 쓴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C. V. Gheorghiu)는 실제 잠수함 승무원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가 이 경험을 토대로 우리에게 들려줬던 ‘잠수함의 토끼’ 이야기는 이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에서 아주 유효한 비유처럼 들리기도 한다. 현재와 같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는 잠수함 내의 산소량 측정을 컴퓨터가 척척 알아서 해줄 것이다. 하지만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00년대 초, 중반만 해도 잠수함에서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은 토끼였다. 유난히 후각이 발달한 토끼가 인간보다 먼저 산소부족으로 인한 위험신호를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오르규는 이 ‘잠수함의 토끼’를, 훗날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징후를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리고 고발하는 ‘시인’의 역할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이 말은 더욱 유명해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병익 위원장(2005년 8월, 초대위원장에 취임했다)은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맞이하여 시인의, 나아가 예술가들의 이 ‘잠수함 속 토끼’ 역할론에 대해 선뜻 동의했다.

 

과학기술의 속성은 끊임없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예술가들의 견제 역할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주에 기댄 예술인들의 창조적 행위는 더욱 외연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인간의 역사는 시대별로 큰 흐름을 주도하는 키워드가 있게 마련입니다. 20세기는 정치와 경제가 주도하는 민족주의 시대였지요. 이제, 21세기는 ‘과학기술과 예술의 퓨전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좋은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도 부각되게 마련이지요. 과학기술의 기막힌 발전이 가져올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예술과 문화는 그 발전 양상의 극단화를 막는 역할과 전망을 숨김없이 제시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위원장은 이를테면 원자력과 핵이 인류에게 가져올 가공할 위험에 대한 경고, 생명공학 분야에서 제기되는 윤리 문제 등은 결국 문화예술인들의 창조적 행위로서 견제되고, 비판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김 위원장은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 속에 내재한 과학과 기술을 예술가들이 재인식해야 하고, 또한 과학 속에 내재할 수 있는 예술적 감수성을 과학자들 역시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표현해 내는 결과물로서만이 아니라, 그 창작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인 도구들도 차근차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과학과 예술(인문학)은 배척되고, 서로 대결해야 할 요소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상대의 영역에 대한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삼았던 것처럼 말예요. 저 역시 과학기술의 진전을 경탄할망정 그것을 제 것처럼 친숙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자의식도 숨길 수만은 없어요.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과학기술과 예술, 상반된 것들이 길항하는 대신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서, 근본적으로 융합하는 세상입니다. 문학과 영화,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음악, 시각예술, 공연예술 등 과학기술과 예술의 결합은 생활 전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지요.”

 

90년대 초 펜과 컴퓨터를 활용한, 각각 달라진 글쓰기 방식은 문학비평가로서 김 위원장이 생생하게 겪은 체험담이었다. 당시 워드로 편지와 같은 짧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그는, 이후 자판이 익숙해지자 종이 위에다 육필로 쓰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펜으로 다시 글을 써 보니, 사고의 진전이 그만큼 더뎌졌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다른 도구의 활용이 글을 쓰는 이의 내면의 흐름, 문체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그때 새삼 확인할 수 있었노라고 김 위원장은 술회했다. 또한 요즘 들어 컴퓨터를 활용한 글쓰기가 대세가 되면서 문장은 간결해지고, 가벼워졌으며, 거칠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변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이러한 점에 비춰 볼 때 ‘예술의 기술화’는 예술인들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예술이 과학기술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미 발터 베냐민이 지적했듯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아우라(aura)를 상실한 지 오래’라고 걱정하기도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주로 예술창작 분야의 지원업무를 하고 있는데요, 지난해 ‘과학기술, 예술을 만나다’ 이 세미나를 지켜보면서 우리 예술계 쪽에서도 예술창작과 과학기술을 점검하고 아우르는 세미나를 한 번쯤 기획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술과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인 듯하지만, 진리 발견의 과정에서만큼은 서로 통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이 표현해내고자 하는 절정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의 내면 깊숙이 침잠하듯이, 과학자의 진리 발견의 순간 또한 매우 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잠을 자다 꿈속에서 본 뱀 꼬리로 벤젠 분자구조 형태를 발견한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의 에피소드를 한 예로 소개했다.

 이처럼 예술적 창조와 과학적 발견의 출발이 같은 자리이듯이, 그 결과 나타날 결론 역시 예술가와 과학자가 그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이 또한 책무라고도 말한다.

 

“종이책과 e-book은 엄연히 그 역할과 기능이 구분될 거라고 전망됩니다. 자전거와 자동차의 예처럼 말이지요. 발명 당시만 해도 주요 이동수단이던 자전거는 자동차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이젠 레저용으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잖아요. 미래의 어느 날에도, 기차나 버스 안에서는 종이책의 책장을 넘기며 소설을 읽는, 인문학적 책읽기가 여전히 유효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e-book은 지식전달 면에서 활용도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1975년 ‘문학과지성사’를 설립, 책 만드는 일과 글 쓰는 일을 병행해 온 김 위원장(2000년 3월 ‘문지’의 대표이사 자리는 후진에게 물려주었다)은 자신의 삶의 여정과 함께 한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렇게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청년시절, ‘문학은 천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한사코 멀리하려 했다는 김 위원장.

하지만 결국 고인이 된 평론가 김현, 학창시절의 문우 황동규 시인과 함께 한 ‘68문학’ 동인이라는

책임감(?)이 40여 년 넘게 그를 문학인으로, 예술인으로 살게 했다며 웃었다.

 


2007년 <과학기술혁신뉴스> 7월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