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여섯에 학사학위 받고, 시인 데뷔한 김원자 씨
새봄, 막 대학 문을 나선 졸업생의 설렘이 이러한 빛깔일까? 그의 옷차림에선 화사한 4월의 진달래가 연상됐다. 올해 나이 예순여섯. 세간의 잣대로라면 만학이었다. 지난 2월 27일 계명대학교 학위 수여식에서 학사학위(문학사)를 받은 김원자 시인. 2001년 9월, 계명대학교 평생교육원 학점은행제 과정에 입학한 지 5년 반 만에 비로소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그것도 ‘최우수성적 장학금’까지 함께 받으면서 따낸 학위였다. 4명의 자녀와, 6명의 손자를 둔 예순여섯의 ‘할머니’가 드디어 학사모를 쓰고 영예로운 대학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는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학교) 영문학과 60학번이다. 그것도 4년 장학생으로 한 입학이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국가 공무원 임용고시에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게 된 것이다.
“공무원 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고 한동안은 그때 제가 시험장에 간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응시를 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라고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어요. 합격하고 1년 후 재무부 관재국으로 발령이 나고 그때부터 10여 년 간 공직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예순셋에 첫 시집 내고, 3년 뒤엔 ‘문학사’ 학위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던 학업에 대한 열망은 그 후로도 좀체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한때는 기업의 최고책임자로서(직물 관련사업을 하던 남편을 도와 날염 회사를 맡기도 했다) 임무를 다해 온 후에도 그 뼈아픈 후회는 그대로인 채였다. 그러던 차에 ‘학점은행제 과정’을 통하여 대학교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때가 예순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학생이었다. 초, 중, 고 시절, 교내외 백일장에도 나가게 되었다. 크고 작은 백일장에 나가 자주 상도 받곤 하던 그의 원래 꿈은 시인이었다(대구지역 학생 백일장에서 입상한 문학청년들이 모여 만든 동인지가 <칡넝쿨>이다). 그 꿈은 자연스레 국어국문학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현대시론, 문예창작 강의를 들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종전의 시 작업이 문학소녀다운 서정성에 기댄, 진솔하지만 거칠고 서툰 것이었다면, 현대의 시 이론을 듣고 난 뒤의 작업은 제게 다르게 다가왔지요. 좀더 세련되고, 정제되었다고 할까요? 그러한 점에서 지도교수이셨던 이현원 교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제 졸시에 대해 언제나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입학하고 처음 수업시간엔 굳이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은 주눅이 들기도 했단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넌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이 나이에 너의 꿈을 이루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리포트나 에세이 하나하나에 더욱 철저한 준비를 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입학 후 건강에 무리가 오면서 한 학기에 3과목 내지 4과목을 이수하다 보니 졸업까지 5년 6개월이 걸렸다. 더욱이 학교가 가까웠던 대구 대명동에서, 2004년 초 경남 합천으로 이사한 후부터는 왕복 8차례의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험난한’ 통학 길의 연속이었다.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말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2003년 <문예한국>을 통해 시인으로 정식 데뷔했다(시 ‘등꽃 아래서’ 외 4편). 그리고 2004년에는 생애 첫 시집 <은화(隱花)>를 출간했다.
‘만학의 즐거움’을 이웃들과 함께…
정식 등단 과정을 거쳐 데뷔한 김 시인은 현재 자신이 누린 이 ‘만학의 즐거움’을 이웃사회와 함께 나누는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 생각은 고향인 이곳 합천으로 이사 온 이후로 더 구체화되고 있다. 우선은 글을 읽지 못하는 농촌지역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제가 사는 곳만 해도 60-70대 연령층 분들 중에 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분들의 지난하게 어려웠던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안타까운 일이예요. 이곳 고향에 와서 새로 사귄 제 ‘갑장 친구들’ 중에도 그런 친구가 더러 있어요. 그들에게 글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게 제 소박한 바람이기도 해요.”
누구나 사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꿈 한 가지씩은 늘 가슴에 품게 마련이다. 이순(耳順)이 훨씬 넘은 나이에, 학사 학위와 문학소녀 시절의 오랜 꿈을 동시에 성취해낸 김원자 시인. 그는 요즈음 얼마나 감사하고, 또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교육마당 21>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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